[프로파일러 이수정] "더 많이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한겨레 2021. 9. 9.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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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탈한 사건이었다.

그랬던 자의 검거 후 일성, "더 많이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가관이다.

만일 뼈저린 자기반성과 죄책감이 자수 행위의 동력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형량 협상의 사악한 의도를 고려하여 형을 더 높이는 것이 필요치 않을까? 연쇄살인범이 '자수'를 통해 폴리스라인 앞에 서서 세상을 공포로 떨게 만드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면 기자들이 대주는 마이크는 세상을 위협하고 공포에 빠뜨리는 공범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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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일러 이수정]

전자발찌 훼손 전후로 여성 2명 살해 혐의를 받는 강윤성이 7일 오전 서울 송파경찰서에서 나오고 있다. 송파경찰서는 이날 강씨를 서울동부지검에 송치했다.연합뉴스

이수정|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허탈한 사건이었다. 인권침해 논란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도입된 전자감독제도. 선진화된 시스템이라고 자신하던 법무부마저 멘붕에 빠뜨리게 된, 전자발찌 훼손 연쇄살인 사건은 강윤성이란 전과 14범에 의해 발생했다. 평생을 강도강간범으로 여성을 약탈하는 것을 업으로 살았던 범인은 알고 보니 자신의 일대기를 옥중 에세이로까지 출간했던 자였다. 그랬던 자의 검거 후 일성, “더 많이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가관이다. 교정교화라는 법무행정의 목표가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여성들을 강간살해 하고도 전혀 반성의 기미 없이 경찰을 조롱하며 자수한 연쇄살인범으로는 일찍이 온보현이 있었다. 온보현은 1995년 당시 지존파 사건에 영감을 받아 그들보다 더 사람을 많이 죽이고자 일기까지 써가며 계획살인을 일삼았던 자이다. 여성 승객 6명을 성폭행하고 이 중 2명을 살해한 혐의로 이제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살인수첩’이란 것은 전국민에게 오랫동안 충격을 안긴 바 있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이었던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에 비해 도주 대신 결국 ‘자수’를 택한 온보현과 강윤성이 지니는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범행의 근본적인 목적에서 발견되는 과시욕구일 것이다. 앞선 세 사람의 연쇄살인이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쌓여 있던 은밀한 성적 욕망 때문이었다면, 온보현과 강윤성의 반복된 범행과 그에 이어지는 ‘자수’는 자기과시적인 표현 욕구가 훨씬 강렬하다고 느껴진다. 범죄를 저지르고 수감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바깥 세상에 자신의 존재감을 지속적으로 피력하려 했던 강윤성이나 날마다 대서특필되는 지존파의 보도를 보면서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여 최고의 악명을 떨치고자 일지까지 써서 경찰에 제출했던 온보현의 범행동기는 훨씬 외향적이고도 표출적이라 하겠다. 그들은 피해자들만을 죽이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협하고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던 것 같다.

강력범죄의 양형인자에서 가장 뚜렷한 감형요인은 다름 아닌 ‘자수’이다. 양형인자로서 반성문이 갖는 실효적 가치에 의문이 제기되는 현재, ‘자수’ 역시도 그 의도가 무엇인지 따져져야 되는 것이 아닌지 묻고 싶다. 만일 뼈저린 자기반성과 죄책감이 자수 행위의 동력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형량 협상의 사악한 의도를 고려하여 형을 더 높이는 것이 필요치 않을까? 연쇄살인범이 ‘자수’를 통해 폴리스라인 앞에 서서 세상을 공포로 떨게 만드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면 기자들이 대주는 마이크는 세상을 위협하고 공포에 빠뜨리는 공범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겠다.

과연 대안이 있을까? 전자감독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합리성에 근거를 두고 만들어진 제도이다. 즉 자신의 행적이 추적될 것이 뻔하기에 스스로 알아서 범의를 자제할 것이란 기대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다시피 경찰에 의한 검거도, 교도소에 수감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범죄자가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자유를 박탈당하는 형벌보다 카메라 앞에서 세상을 향한 위협적 일성이 유일한 목표인 자가 있다면? 연예인처럼 수많은 언론사들의 카메라 렌즈가 자신을 향하도록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 엽기적인 범죄 행각을 지속하는 것이라고 잘못 지각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형사사법 제도들은 모두가 합리적 이성론에 근거한다. 하지만 이런 전제를 수용하지 않는 구성원이 존재한다면? 그들의 재범을 억제하는 것은 결코 현재의 대안만으로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법무행정은 절대 과신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선량하고도 무력한 시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보호수용제도나 가석방 없는 종신형에 대하여 좀 더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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