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향해 열려 있는' 장애인들의 미술 세계..'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 전

김종목 기자 2021. 9. 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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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란 북서울미술관(서울 중계동)의 전시명은 작가 김동현 말에서 따왔다. 김동현의 ‘종이 지도 그림’인 ‘랍국지하철’엔 직선의 길을 찾기 힘들다. 길들은 꼬리를 물며 굽이치듯 지면을 가득 메운다. 길은 덧대거나 이어 붙인 종이들로 늘어난다. 전시명은 “길이 왜 다 구불거려요?”라는 질문에 대한 김동현의 답이다.

김동현, 랍국지하철, 2011, 종이에 펜, 색연필, 74x80cm. 북서울미술관 제공

김동현은 ‘랍국지하철’에 서울 도시철도 1~8호선 노선도와 도로, 터널을 그렸다. ‘컴퓨터 수리’ ‘어린이날’ ‘호박칼국수’ 같은 역명을 펜으로 깨알같이 적었다. 노선과 노선 사이 빈 공간 한쪽엔 ‘의정부동진 국제공항’이란 지명이 보인다. 현실과 가상 공간을 뒤섞었다. 추억의 장소도 포함했다. 랍국은 “IMF 때 6·25처럼 서랍과 동랍으로 나뉘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주사위 놀이선’이란 말도 나온다. 이 그림은 놀이판이기도 한 셈이다. 미술관은 “양초를 절에 납품하는 아버지 차를 타고 전국을 다니며 본 길 위 풍경이 창작에 큰 영감이 되었다. 혼자 학교에 다니면서 지하철 노선도와 열차시간표, 열차 내부를 연구했고, 작은 수첩과 노트에 꼼꼼히 기록하며 자신의 세계를 발전시켰다”고 말한다.

김치형, 깊은 산 속, 2018, 종이에 아크릴, 48x65cm. 북서울미술관

소설가인 김효나가 초청 기획자로 참여했다. 그는 장애인인 김동현의 작품과 전시명을 두고 “이 담담한 한마디 말에 본 전시가 조명하려는 창작과 삶, 그 전부가 들어 있다”고 말했다. 영어로 번역한 전시명을 보면 전시 취지와 목적은 더 분명하다. ‘Shrunken Paper, Expanded World(축소된 종이, 확장한 세계).’

발달장애 작가 16명과 정신장애 작가 6명이 출품했다. 작가들은 제도권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 미술관은 “내면에 몰입해 독창적인 창작 활동”을 해온 이들이라고 소개한다. 작품 737점을 ‘일상성’ ‘가상세계의 연구’ ‘기원과 바람’ ‘대중문화의 반영’ ‘노트 작업’이라는 5개 주제로 분류했다.

한승민의 ‘아크레딘 거미줄’(왼쪽)과 ‘미로거미줄’. 김종목 기자

가상과 상상의 세계에 관한 작품이 많다. 작가들은 주로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받았다. 김치형의 ‘황야의 삶’엔 화염을 토하거나 체액을 흘리며 죽어가는 괴생명체가 나온다. 미술관은 “미국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 녹아 있는 블랙코미디에서 주로 영감을 받는 작가는 폐허가 된 도시, 불안한 징후가 가득한 공간을 작품 배경으로 삼는다”고 했다. 정진호는 ‘록맨’ ‘가면라이더’ ‘비드맨’ 캐릭터의 세계관을 혼합한 ‘하이퍼 비드맨 유니버스’란 세계를 만든다. 고대 신화, 일본과 미국의 애니메이션 캐릭터, 세계 역사, 진화론 등을 연구한 뒤 내놓은 작품이다. 로봇 생명체를 0.3㎜ 샤프로 건축 설계도면같이 정교하게 그려낸 실력 덕에 2017년 방송에 나와 화제가 된 김경두의 작품도 출품됐다.

김경두의 ‘극악세계’(부분 확대). 김종목 기자

작가들은 현실 너머로 가 상상의 세계를 구축하거나 현실 속으로 들어와 고통·불안을 직시한다. 미술관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토로하거나, 스스로 위로하는 내용의 작품들은 ‘기원과 바람’으로 분류했다. 김진홍의 ‘그림자의 그림자의’에선 작가로 연상되는 인물이 자신의 그림자를 쓰다듬는다. 또 다른 작품에선 그림자를 부여잡고 걸어간다. ‘그림자’ 연작은 자신을 위로하는 작품들이다. 미술관은 “불안정한 상황과 정신적인 고통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작가의 경험으로부터 탄생했다. 학창시절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나 마음의 병 탓에 지속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김현우는 자신을 ‘픽셀킴’이라 부른다. 북서울미술관은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 겪었던 삶의 순간을 픽셀의 이미지로 재구성하는데, 특유의 직관적이고 과감한 드로잉으로 시각적 리듬감을 지닌 구조와 색채의 변주를 펼쳐낸다”고 말한다. 사진은 김현우의 작업 모습을 담은 영상(왼쪽)과 작품 ‘픽셀 도큐멘타’. 김종목 기자

박범이 출품작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단어는 고통이다. 괴롭고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법화경님, 제가 당신께 제 고통을 드려요” 같은 한 줄 분량의 짧은 기도문을 블로그에 올리곤 했다. 콜라주 작품과 함께 15년 동안 작가가 적은 기도문도 전시에 내놓았다.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대훈은 정치, 문화, 시사와 대중문화를 차용한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만들고 있는 코끼리’ 같은 재치 있는 풍자를 선보인다.

미술관은 참여 작가들의 노트와 스케치도 전시했다. 사진은 양시영의 노트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에서 고등학교 3학년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다. 말하기 연습이 목적이었다. 미술관은 “온 힘을 다해 눌러 써 너덜너덜해지다 못해 구멍이 뚫린 페이지 앞에서 작가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이들 노트를 보면 그 당시의 시간이 떠올라 가슴이 너무 아픈데 어쩐지 버릴 수 없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미술관은 “(대학 진학 뒤) 좀 더 유연하고 자유롭게 소통하게 되면서 중단되었다. 현재 양시영은 여행에서 본 풍경이나 자연, 동물의 모습을 그리는 작업을 활발하게 진행하며 자신만의 따듯하고 섬세한 언어로 세상과 대화하고 있다”고 했다. 김종목 기자

주목할 건 출품 작가들의 ‘노트 섹션’이다. 미술관은 “병이나 장애의 증상으로 여겨져 정기적으로 버려지거나 방치”되던 이면지나 공책에 담은 메모나 스케치도 내놓았다. 미술관은 “노트 작업 속엔 작가들이 몰두한 기나긴 시간, 즉 이들의 삶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조유경은 주로 여인의 초상을 그린다. 미술관은 “부드러운 곡선이 겹쳐진 얼굴 윤곽과 그 사이로 자리 잡은 다채로운 색상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화려한 속눈썹 사이의 반짝이는 커다란 눈동자는 모두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한다. 작품 여백에는 종종 “Park Hong Do” 또는 “Hong Do Momy”라는 이름이 나온다. 작가의 사망한 어머니 이름이다. 어머니를 모델로 연습장에 패션디자인 드로잉을 했다고 한다. 김종목 기자

‘신안 만인보’전(8월13일~9월5일)을 기획하러 귀국한 네덜란드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관장인 최빛나는 이번 전시가 최근 수년간 본 전시 중 최고라며 짧은 전시평을 보냈다. 그는 출품작들이 “발달·정신 장애가 있어서 또는 그런 장애가 있는데도 훌륭한 그림을 그렸다는 관점을 해체한다”고 했다. 그는 “장애는 더 이상 외부적인 것,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사회문화 구조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무엇’ ‘알 수 없음’ 같은 경험이 일상화하고, 그 경험은 코로나19로 더 강렬해졌기 때문이다. 모두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혹은 장애의 가능성에 연약하다”고 했다. 그는 김효나의 말을 빌려 “작가들은 현실의 단절을 통해서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열려 있는’ 길을 만들고 접고 붙이고 이어나가면서 눈부시고 화사하며 따뜻하고 시원한 비전을 선사한다. 이들로부터 사는 법을 배운다”고 했다.

자신과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라고도 했다. “ ‘다르다’를 ‘같다’고 여겨 차별하지 않는 방법은 눈 가리고 아웅이다. 왜 다르지 않은가. 달라도 한참 다른 그 특별함에 찬사를, 응원을 보낸다”고 했다. 같은 장애가 있다고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최빛나는 “저마다 다름을 특별하게 보는 것은 일상적으로 장애로 인지되거나 분류되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우리는) 남들과 다르고 특별한 자신의 것을 남의 것에 끊임없이 비교하며 동일화” 하기 때문이다.

김효나는 이들의 예술을 ‘아웃사이더 아트’ ‘에이블 아트’ ‘장애예술’로 규정하기에 앞서 작가들이 긴 시간 홀로 대체 무엇을 표현·발언하는지 충분히 보고 들어봐 달라고 했다. 전시는 9월22일까지.

북서울미술관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 전시장 입구. 김종목 기자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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