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여도 야도 싫다…제3세력은 성공할까
김순덕 대기자 2021. 9. 9. 18:00
못 살겠다 갈아보자, 싶다. 하지만 여(與)도 야(野)도 싫다. 젊은 대표가 나오면 달라질까 했는데 국민의힘 하는 꼴 보니 정권교체도 물 건너간 것 같다. ‘증말’ 저렇게 밖에 못한단 말인가.
이런 국민을 겨냥한 대선 주자가 나왔다. “지금 여·야 정당의 경선과 후보들 간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 살림은 생사의 기로에 내몰리고 있는데 미래준비는 턱없이 부족한데도 정치권은 권력쟁취만을 위해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8일 대선 출마 선언문을 발표한 김동연이다. 문재인 정부 첫 경제부총리를 지낸 그는 “보수는 의지가 부족하고 진보는 능력이 부족하다고들 하지만 진보와 보수 모두 의지도, 능력도 부족하다”고 기득권 정당을 싸잡아 비판했다. “조직도, 돈도, 세력도 없지만 정치판의 기존 세력과 맞서는 스타트업을 시작한다”는 출사표다.
● 김동연이 내세운 ‘마크롱 전략’
그러나 정치스타트업도 기존 정치문법을 완전 무시할 순 없는 모양이다. 유튜브 채널로 출마선언문을 발표한 것으론 모자랐는지 김동연은 9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들 질문이 야권후보 단일화로 모아진 건 당연하다. 그는 단호했다. “단일화문제는 제 머릿속에 없다.”
안 그래도 ‘고발 사주’라는 복잡한 의혹으로 이 당 저 당 죄 짜증나는 상황이다. 후보는 좋은데 당이 싫어서 투표장 못 간다는 사태가 벌어질 판이다. 이런 양당구조를 깨고 ‘아래로부터의 반란’을 하겠다는 김동연의 모델이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이다. 8월 20일 고향인 충북에서 출마 선언을 할 때도 그는 “마크롱도 고향에서 출마선언 했다”고 프랑스를 언급했다. 인기 없는 좌파 정부의 경제관료 출신인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있다. 프랑스엔 결선투표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 결선투표제 프랑스는 ‘단일화’ 필요 없다
프랑스는 1962년 제5공화국 개헌에서 결선투표제를 도입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안 나오면 1, 2위 득표자만 놓고 2주 뒤 결선투표를 치른다. 1962년부터 2017년까지 매번 결선투표를 했는데 1974년 지르카르 데스탱,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 1995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1차에선 2위였지만 결선에서 당선된 역전의 용사들이다.
1차 투표 후 각 정파들이 치열한 ‘선거연합’이 벌이는 건 이 나라에서 보통이다. 3위 이하 후보들이 “나 대신 X번을 찍어달라”고 공개적으로 합종연횡을 하는 것이다. 덕분에 프랑스는 우리처럼 선거 전 굳이 야권 후보 단일화를 할 필요가 없다.
마크롱은 2017년 4월 1차 투표 1위지만(24%) 2위(국민전선 마린 르펜 21.3%), 3위(우파 공화당 프랑수아 피용 20%)와 바짝 붙은 상태였다. 그가 5월 7일 결선에서 66.1%로 압도적 득표를 올린 데는 야당인 공화당 피용 후보는 물론 마크롱이 원수처럼 미웠을 대통령까지 “극우세력 집권은 안 된다”며 거국적 지지를 보낸 영향이 컸다.
● 단일화 거부하면 제3지대 역적 될 판
우리나라도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2012년 박근혜 당선 때 51.55% 득표를 제외하곤 과반수를 넘긴 대선이 없다. 1987년 양김(김영삼·김대중) 분열로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1991년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이 생겨난 이래, 후보 단일화는 야권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1997년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이 없었으면, 2002년 정몽준이 노무현에 단일화 당하지 않았다면, 민주당 정권은 탄생할 수 없었다. 안철수는 2012년 문재인 측의 거센 단일화 압력에 역적처럼 밀리다가 결국 출마를 포기했고, 2017년엔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겠다고 완주했다 3위로 밀려난 흑역사를 갖고 있다.
당시 득표율이 문재인 41.1%, 홍준표 24.0%, 안철수 21.4%다. 촛불시위가 일어나고 전임 대통령이 탄핵 당했음에도 1위 후보는 과반수 득표를 못한 것이다(그래서 국민 절반의 지지도 못 받은 대통령에게 민주적 정당성이 있느냐! 등의 이유로 세계 89개국에선 대선 결선투표제를 한다).
● 결선투표 있다면 문재인 대통령 가능했을까
현재 문 대통령 지지율이 당시에 못 미친다. 2017년 대선 때 2위와 3위 후보를 합치면 무려 44.4%! 1위를 능가했다. 제3지대라던 국민의당 안철수와 당시 자유한국당 홍준표가 야권후보 단일화를 했다면, 아니 결선투표로 1, 2위 후보가 재대결할 수 있었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안 나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국민의힘 입당이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단일화를 하네 마네 또 희망고문하는 후보는 국민의 역적이다. 결선투표제가 있으면 유권자는 사표방지 심리 없이, 당선 가능성을 따져보는 ‘전략적 투표’ 없이도 마음 편히 원하는 후보를 찍을 수 있다. 2차 투표라는 또 한번의 기회가 있으니까.
2017년 7월 문 정권이 들어선 뒤 법과역사학회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연구 용역보고서에서 “결선투표제를 통해 우리사회 고질병인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세대 간, 계층간 화합을 도모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는 목표는 헌법정신에 지극히 부합하는 태도”라고 밝힌 바 있다. 프랑스 정치학자 모리스 뒤베르제는 결선투표가 유연한 다당제를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 보험이 못 된다면 막판 사퇴해주시길
개헌 없이 결선투표제를 도입할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 김동연 같은 제3지대 후보의 ‘단일화 없음’ 포부가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권교체 열망이 드높던 프랑스에서 그 똑똑한 마크롱도 2016년 12월까지 지지율 18% 3위에 불과했다.
1위를 달리던 우파 후보는 2017년 1월 가족 부패 사건이 불거지면서 뒤처지기 시작했다. 1위로 올라선 극우파 후보를 마크롱이 제친 것은 3월 20일 첫 TV토론 이후라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 작지 않다.
어쩌면 김동연 같은 제3지대 후보는 정권교체를 원하는 국민에게는 보험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그러나 국민의당 대표 안철수가 또 출마하면 어떤 보험을 끝까지 유지할지 고민될 것이다). 누구든 정치를 바꿀 작정이라면, 마크롱은 좌(左)도 우(右)도 아닌 것이 아니라 선명한 자유주의 비전을 들고 나왔음을 더 공부했으면 한다. 정권교체에 걸림돌이 될 경우, 결선투표제 필요성을 외치며 막판에 장렬하게 사퇴할 필요가 있는 건 물론이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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