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발] 오사마 빈라덴의 '승리'가 남긴 것/ 박민희
[아침햇발]
박민희 ㅣ 논설위원
20년 전 9월11일,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납치한 항공기 3대가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워싱턴 국방부 청사에 충돌하는 모습을 전세계가 충격 속에 지켜보았다. 미국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은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을 내놓으라며 2001년 10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고, 2003년 3월에는 유엔의 반대도 무시하고 이라크까지 침공했다.
20년 뒤, 탈레반이 다시 아프간을 장악하고 테러와 아비규환 속에 미군이 도망치듯 탈출하는 장면을 2011년 죽은 오사마 빈라덴이 살아남아 보았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미국을 응징하겠다”던 자신의 목표가 실현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미군 2442명, 동맹군 1144명이 목숨을 잃었고, 아프간 사망자는 17만여명으로 집계됐지만 실제는 훨씬 많을 것이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프간 전비가 1조달러라고 했지만, 브라운대 왓슨연구소는 2.31조달러(2672조원)가 들었다고 분석했다. 아프간·이라크 전비를 합하면, ‘테러와의 전쟁’의 비용은 6.4조달러다. 더 큰 문제는 이 전쟁이 남긴 빚더미다. 1·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 등은 세금을 인상해 전비를 충당했지만, 부시·트럼프 행정부는 오히려 ‘부자 감세’를 하고 2조달러가 넘는 국채를 발행해 빚으로 전쟁을 지속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이 엄청난 부채를 이자까지 더해 갚아야 한다.
그동안 록히드마틴, 보잉 등 미국의 5대 무기기업과 이들에 투자한 월가 금융기업들은 전쟁의 이익을 독점했으며, 금융위기가 일어났고, 지독한 불평등에 분노한 백인 저소득층의 분노가 트럼프를 당선시켰다. 빈라덴과 알카에다가 미국에 거둔 ‘승리’는 미국을 거대한 빚더미와 불평등의 늪에 빠뜨림으로써 미국의 사회와 경제, 정치를 망가뜨린 것이었다.
미국이 늪에 빠진 기회를 중국은 기민하게 활용했다. 9·11 테러 이후 중국은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하는 대가로, 위구르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ETIM)을 미국과 유엔이 테러단체로 지정하도록 했다. 이를 이용해 중국 당국은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위구르인들의 중국 통치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테러리즘’으로 몰아 탄압할 수 있었다. 중국과 미국의 자본은 긴밀하게 결탁해 중국 곳곳에 저임금 노동력을 이용한 생산망을 확대하고, 무역과 금융에서 밀월관계를 이뤘다.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미국의 13%(2001년)에서 71%(2020년)로 급성장했다. 이제 시진핑 지도부는 ‘중국은 부상하고 미국은 쇠퇴하고 있다’며 미국 주도 국제질서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아프간 철군은 이 흐름을 되돌릴 전환점을 만들려는 것이다. 미국이 자유주의 국제질서 확산이라는 비현실적 목표에 더 이상 역량을 소진하지 말고, 유럽·중동은 역내 국가들의 균형에 맡기고, 새로운 주적인 중국 견제에 힘을 집중하려는 현실주의 전략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방향은 정해졌지만 구체적인 로드맵은 아직 모호하다. 미국이 구상하는 새로운 질서에서 중국과 어디까지 협력·경쟁할지가 명확하지 않고, 중국과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동맹들이 미국의 요구대로 중국과의 디커플링에 나설 경우의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다. 미국은 한국, 일본, 호주, 대만 등에 중국 견제와 관련한 더 많은 역할을 요구하겠지만, 미국 스스로도 로드맵을 분명하게 그리지 못했다.
그런데 외교전략보다 바이든 정부에 더 우선인 과제가 있다. 과도한 전비 지출을 멈추고 빚을 갚고 무너진 미국 중산층과 사회·경제를 재건하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1조2천억달러의 인프라 예산과 3조5천억달러의 사회복지 예산을 통과시켜 노동자 가구와 중산층을 살리고 불평등을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뉴욕타임스>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회복지망을 새로 짜는 변혁”이라고 평가했다. ‘반독점의 선구자’로 불리는 리나 칸 컬럼비아대 교수를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으로 임명해,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등 빅테크 기업의 시장 독점을 막는 임무도 맡겼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공동부유’라는 깃발을 들고 나온 것이다. 중국 사회의 극심한 불평등을 줄이고 저소득층의 복지를 강화해 중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지 않고는 발전의 한계에 부딪힐 거라는 문제의식이 분명하다. 물론 민영기업에 대한 강압적 통제나 노동운동가들에 대한 탄압 등 방법론은 우려스럽다.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 공산당이 직접 통제하는 국유자산도 분배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그런데 중국이 빅테크 규제와 관련해 미국보다 선제적으로 움직이는 부분은 주목할 만한다. 지만수 한국금융연구원 국제금융연구실장은 “중국이 과거에는 해외에서 검증된 제도를 선택적으로 도입했다면, 개인정보 보호를 비롯해 빅테크 규제나 플랫폼 노동자 사회보장 등은 미국과 동시에 또는 선제적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며 “미국과의 새로운 표준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바이든과 시진핑 모두 ‘주전장’은 국내의 불평등 해결임을 인식하고 있다. 미-중이 이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면서 혁신과 성장을 유지할 수 있느냐가 진정한 승부가 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디커플링과 첨단산업 공급망 재편, 플랫폼 독점 해법, 그리고 새로운 국제질서도 명확해질 것이다.
한국 정치인들은 불평등 해결, 초고령사회 대비, 미-중 ‘공동부유’ 경쟁이 한국과 세계에 미칠 영향을 제대로 고민하고 있는가.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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