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72%가 직장 떠나는 '성폭력 경력단절'을 아시나요?

최윤아 2021. 9. 9.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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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단절 요인 결혼·출산·육아·돌봄 꼽히지만
직장 내 성희롱 피해 뒤 퇴사 내몰리는 여성 적잖아
2016년 민간 조사 "성희롱 피해자 72%가 직장 떠나"
게티이미지뱅크
#1. 회식 뒤 집에 돌아왔는데 대표가 전화를 했어요. 전화로 성희롱을 했는데 대표가 한 전화라 먼저 끊지도 못하다가 코 고는 소리를 듣고서야 끊었습니다. 밤새 고민하다 다음날 어제 일을 대표에게 얘기하니 자기는 그런 적이 없다며 “자작극이다, (회사를) 나가라”고 하더군요. 정말 해고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회사 대표가 성추행을 해서 피해 다녔어요. 그랬더니 대표는 제가 일을 못 한다는 둥 험담을 하고 다녔고, 몇 개월 전부터는 툭하면 제게 화를 냈습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었는데, 퇴사하고 나니 억울합니다. 이 억울함을 풀 방법이 없을까요?
-서울여성노동자회 2020년 전화 상담 사례집 ‘일하는 여성의 권리찾기 이야기’ 가운데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은 경력단절여성을 ‘혼인·임신·출산·육아와 가족구성원에 대한 돌봄 등으로 직장을 그만둬 비취업 상태에 있는 여성’이라 정하고 있다. 그러나 법은 전혀 알지 못하는 또다른 ‘경력단절’을 여성은 강요당한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 뒤 비자발적으로 퇴사하며 생기는, 말하자면 ‘성폭력 경력단절’이 그것이다.

생애주기상 첫 경력을 개발·관리하고 자기발전을 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인 20, 30대의 여성이 직장 내 성폭력 피해를 당한 뒤 퇴사하거나 해고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도 이들의 현황과 규모를 보여주는 국가의 통계는 물론, 지원 정책도 없는 실정이다.

일단 여성가족부가 직장인 상대로 실시하는 ‘성희롱 실태조사’에서도 ‘성폭력 경력단절’은 추려지지 않는다. 이 조사는 공공·민간부문의 30인 이상 사업체 일반 직원과 성희롱 예방교육 업무 담당자 1만904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성희롱 실태를 파악하고자 3년마다 이뤄지지만, ‘재직자’만을 대상으로 한다. 성희롱 피해 뒤 되레 직장까지 떠나야 했던 ‘퇴사자’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

여가부는 3년마다 ‘경력단절 실태조사’도 진행하지만 △결혼 △임신 △출산 △가족 돌봄 △자녀 교육 △그 외 등으로만 답변을 수집한다.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퇴사는 “그 외”일 뿐이다.

법도 모르고 국가통계로도 알 수 없지만, 직장 내 성폭력에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중고의 경력단절 유형은 엄연히 존재한다. 서울여성노동자회가 2016년 직장내 성희롱 피해자 10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72%가 성희롱 피해를 본 뒤 퇴사했다. 이 가운데 57%는 1개월 내, 11%는 3개월 내, 14%는 6개월 내, 18%는 6개월 이후 퇴사했다. 반년 내 퇴사자 비율이 82%에 이른다. 신상아 서울여성노동자회 회장은 <한겨레>에 “여성가족부 실태조사는 재직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2차 불이익에 대한 조사가 부족해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고용단절을 포착하는 데 한계가 있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의 상당수가 6개월 내에 퇴사했다는 수치는 사업주의 피해자 보호조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했다.

재직자만을 대상으로 했을지언정 ‘성희롱 실태조사’ 또한 경력단절의 요인으로 직장 내 성폭력이 작동할 가능성을 확인해준다. 가장 최근치인 2018년 실태조사에서 여성 응답자의 14.2%가 성희롱 피해를 겪었다고 답했다. 이들은 성희롱 피해 경험의 영향을 묻자 △특별한 영향이 없다(36.5%) △직장(내 성희롱 예방정책, 문화 등)에 대한 실망감을 느꼈다(33.8%) △근로의욕 저하 등 업무 집중도가 떨어졌다(25.9%)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나빠졌다(10.6%) △(성희롱 사건으로 인해) 직장을 떠나고 싶다고 느꼈다(9%) 순으로 답했다. 퇴사 의향을 즉각 드러낸 이들의 비율은 높지 않으나, 직장에 대한 실망감·근로의욕 저하·건강 악화 등은 결국 피해 당사자들을 퇴사로 떠미는 요인이다.

성폭력 경력단절을 줄이기 위해서는 피해자 보호조치가 필수적이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사업주에게 피해자 보호를 비롯해 사건 조사, 징계 등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고용주가 가해자인 경우가 허다하다. 서울여성노동자회가 2018년부터 2020년 7월까지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 신규 상담사례 864건을 분석한 결과, 사장에 의한 성희롱이 205건(25.3%)이었다. 피해자 보호는커녕, 비자발적 퇴사 또는 해고라는 이중적 피해가 강제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50인 미만 사업장이 전체 기업의 98.8%(2019년 기준)인 구조에서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가 보호받지 못하고 경력단절을 겪게 되는 경우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상사에 의한 성희롱은 55.4%에 이른다. 직장 내 성희롱 가해자 10명 중 8명은 상사이거나 사장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주로 하급자 위치에 있는 피해자가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주장하지 못한채 경력단절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전문가들은 근로감독관의 역할 확대가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신상아 회장은 “사업주의 보호조치가 미흡할 경우 피해자는 고용노동부에 신고한다. 그러면 근로감독관이 진상 파악에 나서는데, 통상 해당 행위가 성희롱이냐 아니냐만 협소하게 판단할 뿐이다. 사업주가 사건 조사하는데 시간을 끌어 피해자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는지, 피해자에 대한 2차 불이익은 없었는지는 등은 충분히 살피지 않는다. 이런 부분까지 폭넓은 조사가 이뤄지도록 고용노동부가 제도를 점검·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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