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는 거야, 누군가의 생명으로

2021. 9. 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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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착하고 미소가 예쁜 아들이었다. 평소 좋아하는 떡볶이를 먹고 잠자리에 든 아들이 머리가 아프다고 쓰러진 건, 다음날 새벽이었다. 순간이었다. ‘다발성 뇌출혈’. 뇌사 판정이 내려졌다. 

2000년 3월, 16살의 강석민 군은 그렇게 세상에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가족들은 황망했다. 건강했던 아이를 그대로 보내선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누군들 그 결정이 쉬우랴. 쉽진 않았지만, 아들의 장기와 피부, 뼈, 골수를 기증했다. 반대도 컸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얼마만큼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충정로 역사에 있는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홍보관.


우연히 지하철 충정로역사에 있는 ‘사랑의 운동본부 장기기증 홍보관’에 들렀다. 몇 년 전, 장기이식관리센터(현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 전신)와 한국조혈모세포은행협회에 가보고, 장기기증과 이식에 더 관심이 생겨왔던 터다. 내부에 전시된 기증자들의 흔적을 보다가 한 곳에 시선이 멈췄다. 앳된 얼굴로 밝게 웃는 아이. 바로 석민이었다.  

홍보관에는 여러 사연들이 놓여 있었다.


“제 아들이에요.”

안내를 해주던 강석민 군 아버지 강호(해성국제컨벤션고 교목) 씨는 밝은 목소리였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아들이 떠난 3월이 되면 더 그립다고 했다. “아이를 보내면서 자신에게, 가족에게 설득했어요. 장기기증을 하자고. 누가 받을지 모르지만, 절실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또 저희도 그렇게 아들을 기억할 수 있으니까요.”

아들의 장기를 기증하고 부부도 함께 장기기증을 서약했다. 이후 장기기증 유가족 모임을 만들었다. 같은 마음으로 공감을 하니, 서로 위안이 됐다. 

2018년 장기기증 대기 중 사망자는 하루 5.2명(왼쪽), 스페인, 미국의 뇌사 기증률(명/인구 100만 명당) 그래프(오른쪽).(출처=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


장기기증 의사표시 방식에는 옵트인(본인이 생전에 장기기증에 동의한 경우, 허용하는 방식)과 옵트아웃(직접 장기기증 거부 의사를 등록하지 않으면 장기기증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있다. 홍보관을 둘러보며 되새겨보게 됐다. 유럽이 시행하는 옵트아웃에 장기기증이 훨씬 높은 이유도 알았다. 

현재 옵트인을 시행하는 우리나라에서 장기기증은 뇌사 상태일 경우, 가족의 동의를 받아야 하므로 미리 가족에게 알려줘야 한다. 

석민 군 아버지 강호 씨는 핸드폰을 꺼내 아들의 의젓한 사진을 보여줬다.


홍보관을 나오면서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장기기증을 하게 된 딸의 부모님이 엮은 책을 선물받았다. 꿈 많은 발랄한 여학생 이야기를 읽으면서 절망이 아니라, 간절한 아홉 명과 그 가족들, 나아가 읽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석민이는 웃음이 맑고 꿈이 많았던 아이였다.


9월 9일은 장기기증의 날이다. 장기기증으로 최저 9명의 생명(심장, 간장, 신장 2개, 폐장 2개, 췌장, 각막 2개)을 구할 수 있다는 의미다. 

국민권익위원회에서는 작년 12월 국민생각함을 통해 장기기증제도의 개선에 대한 국민 의견을 수렴했다. 여기서 나온 의견과 전문가 의견을 정리해 뇌사 장기 기증자 지원확대 등 지난 3월 ‘장기기증제도 실효성 제고방안’을 마련했으며, 내년 2월까지 복지부에 제도 개선 추진을 권고한 바 있다. 

또한 보건복지부는 지난 3월 23일 ‘장기·인체조직 기증 활성화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기존에는 장기매매 등 불법 행위 근절 및 이식 환자의 공정한 기회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번 정책은 이를 포함해 기증자 유가족 서비스 제공 등 종합적인 지원 방향을 마련했다는 점을 눈여겨 볼만하다.

장기기증을 한 최요삼 선수의 모습 등도 볼 수 있었다.


다행이라면 장기기증에 관한 인식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 할까. 요즘 종종 보는 드라마 속에서 장기기증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최근 장기기증자가 증가하고 있단다. 

보건복지부 산하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서는 올 7월 장기기증 희망 등록 참여자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11배 이상 증가했다고 밝혔다. 또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누리집이나 여러 관련 기관 사연에서도 드라마를 통해 희망 등록에 참여하게 됐거나 떠올랐다는 소감을 볼 수 있었다. 드라마는 끝나도 장기기증 참여는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하늘색 그림 속 석민이는 우리 아이와 같은 나이였다.


“오히려 그냥 떠나는 게 더 두려운 거 같아. 필요한 사람을 살리고, 나 역시 어딘가에 남지 않겠어.”  

오래전 부모님이 교회서 장기기증을 서약하고 돌아오던 날 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동시에 드라마 속, 아이의 심장 이식을 기약 없이 기다리던 애타는 부모 얼굴도 겹쳐졌다. 아직도 우리는 하루에 5명의 환우가 장기이식을 받지 못해 목숨을 잃고, 약 4만여 명의 환우들이 유일한 치료 방법인 장기이식을 기다리고 있다.  

기증자 가족들이 기증인이 좋아하던 색의 모래를 넣어 기억하기로 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 모르는 이에게 장기를 기증한다는 건, 선뜻 결정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장기기증이야말로 삶의 마침표를 가장 가치 있게 이어주는 게 아닐까.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삶의 일부로서.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
https://www.konos.go.kr/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김윤경 otter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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