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훤의 왈家왈不] 조삼모사 원숭이로 보는 착각
정부는 과연 주택 실수요자들에게 내 집 마련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할까?
몇 년 사이에 이런 생각, 아니 의심이 부쩍 많이 든다. 부동산 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무주택자와 서민, 실수요자를 위한다고 했지만, 그 사이 집값은 ‘넘사벽’ 수준으로 폭등했고 전세나 월세 부담마저 은행 빚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면서 무주택·서민의 집 걱정이 줄었을 리 만무해서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만 서른 차례 가까운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지만 집이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정부 대책에 불만 한가득이다.
집이 한 채라도 있는 사람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집을 사고 싶거나 사야 하는데 살 수 없는 무주택 혹은 실수요자들의 불만은 대체 어떻게 풀어야 하나?
안타깝지만 지금 정부 정책 기조로는 이들에게 내 집 마련의 기회가 그리 쉽게 다가올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차라리 이들에게 대놓고 “어지간하면 목돈 없이 집 사는 것은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 정말 나쁜 건 주택공급 제도 조금 그럴싸하게 고치고선 이들에게 청약 당첨의 기회가 주어질 거란 희망고문을 한다는 거다.
정부가 이번엔 신혼부부와 생애최초 특별공급 신청 기준을 일부 개편해 11월부터 신청자들의 당첨 기회를 늘리겠다고 한 것도 뜯어보면 희망고문을 위한 조삼모사에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 개편안을 보면, 미혼인 1인 가구도 전용 60㎡(25평) 이하에 한해 생애최초 특별공급을 신청할 수 있게 됐고, 소득기준(도시근로자 월평균 소득 160%, 3인 가구 965만원)을 넘어서는 맞벌이 가구도 신혼부부·생애최초 특별공급에 청약할 수 있게 됐다.
대책을 마련한 국토교통부는 “청약 시장에서 소외된 청년층 등의 수요를 신규 청약으로 흡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청약제도 개편의 취지와 기대를 알렸다.
언뜻 보면 그동안 소득과 가구수 기준에 발목이 잡힌 맞벌이 가구와 1인 가구의 청약 숨통이 트일 것 같지만, 이 정도 수준으로 얼마나 많은 실수요자가 ‘새롭게’ 구제될지 의문이다. 청약 당첨이 ‘하늘의 별따기’인 건 1인 가구든 유자녀 신혼부부든 청약 신청자라면 지금 누구나 똑같이 겪는 어려움이다.
어차피 정해진 특별공급 물량에서 특정 대상에 할당되는 물량이 늘어나면 그렇지 않은 쪽에선 물량이 줄어드는 셈이 된다. 전체의 이익(청약 당첨 물량)이 일정해 한쪽이 득을 보면 다른 한쪽이 손해를 보는 ‘제로섬(zero-sum)’인 거다. 제한된 물량을 가지고 한쪽 것을 떼서 다른 한쪽에 나눠 주며 생색을 낸다고 하면 너무 야박한 표현일까.
내 집 마련을 원하는 주택 실수요자들의 길을 터 줄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주택담보대출이란 열쇠를 쥐고 있지만 쉽게 열도록 두지 않으려는 데서 갈등이 생긴다.
아무리 좋은 주택이 많이 공급되고 사고 싶은 집이 넘쳐도 지금은 ‘내 돈’ 없이는 허사다. 집값의 최소 60%는 손에 들고 있어야 한다. 15억원이 넘는 집은 전액 목돈을 내고 사야 한다. 시쳇말로 ‘발에 차이는 게 10억 아파트’일 정도로 집값이 오른 터라, 지금의 담보대출 기준으로는 웬만한 현금 부자 아니고선 집 사는 건 언감생심이다.
그렇다고 당장 분위기가 바뀔 것 같지도 않다. 지난 4월 재보선 선거에서 참패한 여당의 당대표 선출 과정에선 부동산 민심 역풍을 의식해서인지 후보들 대부분 부동산 대출 규제 및 세금 완화, 규제 개선 등을 앞세웠지만 어느새 조용해졌다.
이런 가운데 시중은행은 잇따라 부동산 관련 대출 중단에 나서고 있다. 금융위원회가 은행 단위로 가계대출 상황을 직접 관리하고, 연초 설정한 대출 한도를 넘기지 않도록 바싹 조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취임한 고승범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담보대출 완화에 부정적이다. 고 위원장은 “갚을 수 있는 만큼 빌려주는 관행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온 터다. ‘돈 없으면 집 사지 말라’는 이 정부의 원칙이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 대목이다.
가계부채 부실을 우려하는 금융 당국으로선 대출을 규제해서라도 금융 건전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금융 건전만큼 주택 실수요자의 내 집 마련의 가치 또한 중요하게 여기는 정부라면 대출 규제 완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더 입체적인 운영을 고민해보는 것은 필요치 않을까 싶다.
무주택자의 주택 구매와 같이 실수요가 입증되는 경우에는 차주의 소득 등을 고려해 총부채상환비율(DTI)이나 담보대출인정비율(LTV)을 ‘과감한’ 수준까지 높여 길을 터주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
주택담보대출 규제에 대한 집착도 조금은 내려놓으면 어떨까. 담보대출이 늘어난 데에는 대출 건수가 늘어난 것도 있지만, 똑같은 담보인정 비율에서 담보가치 상승에 따라 대출액 늘어난 원인이 있다. 후자의 경우엔 대출액수가 증가한 만큼 부실 우려도 함께 커졌다고 볼 수 없다.
은행에 자율도 좀 줬으면 좋겠다. 획일적인 정부 가이드라인만 따르라는 관치금융도 이참에 사라졌으면 한다. 시중은행 스스로 리스크를 관리하고 책임 질 정도의 경영 능력은 이제 갖추지 않았나.
언제까지 내 집 마련 수요자들을 아침 3개 저녁 4개에 화 났다고 아침 4개 저녁에 3개로 달랠 수 있는 원숭이로 볼 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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