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 정권서 더 정치화된 관료들, 벌써 대선 바람 타기 시작
청와대 비서관 출신의 산업자원부 1차관이 부처 정책 중에 “정치인 입장에서 ‘할 만하네’라고 받아줄 만한 게 잘 안 보인다”면서 “(대선) 공약으로서 괜찮은 느낌이 드는 어젠다를 내라”고 직원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대선을 앞두고 유력한 대선 후보 입맛에 맞는 정책을 개발해 줄 대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차기 권력 줄 대기’는 산자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재명 경기 지사가 여당 대선 주자로 부상하자 일부 부처는 이 지사의 ‘기본 공약’ 시리즈를 뒷받침할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있다고 한다. 이 지사가 주장하는 기본소득·기본주택에 맞춰 지역·기관별로 연구개발 예산을 골고루 나눠주는 ‘기본 R&D’ 아이디어까지 낸 부처도 있다. 어떤 부처는 대선 결과에 대한 시나리오를 짜서 여야 후보별로 정책·예산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양쪽 구미에 맞는 정책을 각각 들고 눈치 보고 있다가 집권하는 쪽 입맛에 맞는 정책을 들이밀겠다는 것이다. 중앙 부처뿐 아니라 지자체와 산하 공기업까지 이미 대선 영향권에 들어가 있다.
이 정부 들어 ‘정책의 정치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정권이 주요 정책을 시시콜콜 주도하면서 정상적인 정책 결정 시스템이 다 무너졌다. 탈원전, 소득 주도 성장, 일자리 정책,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26차례의 부동산 대책, 임대차 3법 등이 모두 해당 사안에 경험 있는 공무원 집단이나 전문가 의견은 배제된 채 정권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됐다. 그 결과 원전 생태계가 무너지고, 좋은 일자리가 사라졌으며, 소득 격차가 심화되고 집값이 최악으로 치솟는 등의 부작용을 일으켰다.
과거 정부에선 정치가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밀어붙이면 그래도 관료들이 목소리를 내서 조정하는 과정이 있었다. 전문가 의견을 수렴하고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정책 다듬기도 관가(官街)의 전통이었다. 세금 낭비를 막기 위해 투입된 예산 대비 정책의 실효성도 따져가면서 추진했다. 하지만 이 정부 들어 전문가 관료 조직의 정책 입안·조정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됐다. 그 결과 부작용이 뻔히 예상되는 비현실적 정책이나 전 국민 현금 뿌리기 같은 낭비성 매표(買票) 행정이 비일비재해졌다. 산자부 차관이 말한 ‘정치인 입장에서 할 만하네’에 해당하는 정책은 바로 이런 정책들일 것이다.
국민 세금으로 월급 받는 공무원은 정권 아닌 국민과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기본 상식조차 사라졌다. 승진시켜주는 정권 앞에 공무원들은 바람이 불기도 전에 드러눕는 풀과 같다고 한다. 대선 바람은 태풍이다. 각 부처 공무원들은 이미 풀처럼 드러누워 대선 후보 입맛에 맞는 공약을 궁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선거는 필요악이라고 하지만 그 해악이 갈 데까지 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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