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잃었지만 잊을 수는 없는

오은 시인 2021. 9. 9.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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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안색이 왜 그래요?” 상대는 분명 나를 염려해서 한 말일 텐데,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마주한 나는 평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피로해 보여서일까. 방금 전의 내 모습을 알 수 없기에 속이 복잡했다. “뭔가를 잃어버린 표정 같아요.” 다시 돌아간 자리에서 그가 말을 이었다. 3년 만에 만나는 자리였다.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사이 내게 일들이 있었다. 소중한 이들을 잃었고 나는 그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오은 시인

집에 돌아오는 길, 뭔가에 홀린 듯 인테리어 소품 가게에 들어가 모래시계를 구입했다. 진열장에 있는 모래시계가 나를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안색을 살피며 “괜찮아?” 하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뭔가를 잃어버린 표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즉각적으로 요동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나를 간파해서가 아니다. 아마도 감정이 드러났다는 게 불편해서였을 것이다. 마스크를 껴도, 웃음을 가장해도 결코 숨길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감정을 쓰는 일과도 같다. 상대가 새로운 이라면, 한 명이 아니고 여러 명이라면 감정의 부피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프리랜서인 나는 매일의 일정이 다르고 자리에 따라 역할도 변화한다. 시에 대해 말하는 자리라고 해도 누구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초점이 달라진다. 청중의 반응을 살피지 않을 수도 없다. 스스로를 향해 잘하고 있다는 응원을 보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상대가 있을 때 감정은 언제든 생성되고 증폭될 수 있다. 상대 때문에 감정을 상대해야 하는 일도 생긴다.

얼마 전 콜센터상담원이 쓴 <믿을 수 없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게 억지스러운>(코난북스)을 읽었다. 감정 노동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그들은 상대의 감정을 받아내느라 스스로의 감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 “상담사들은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스크립트대로, 언제나 고객을 중심으로 대화하는 법을 익힌다. 그래서 갈수록 자신을 주어로 삼은 문장을 만드는 걸 힘들어하게 된다. 나는 무엇을 원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어떤 기분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갈수록 힘들어진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죄송합니다”를 연신 입에 올려야 하는 사람을 떠올리니 아뜩했다.

“그렇게 말하면 안 피곤해요?” 다음날, 강연을 마치고 일어나는데 담당자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아마도 헤아리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말하면 힘들지 않으냐는 말이었을 것이다. 내겐 아리는 말로 들렸지만 말이다. 맥이 탁 풀린 채로 또다시 ‘잃어버린 표정’을 짓고 말았던 모양이다. “괜찮으세요?” 상대가 다급하게 물었다.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자리를 뜨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대 위에 올라가는 일은 가면을 쓰는 일이다. 가면 사이로 진짜 표정이 드러나는 순간, 감정은 뒤죽박죽되어버린다.

문득 감정을 감정(減定)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감정의 양이나 수를 줄인다면, 여력이 생길 것 같았다. 감정을 ‘찻잔 속 태풍’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테지만, 찻잔의 세계가 양동이의 그것보다 작다고 해서 무시하면 안 된다. 삶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가리켜 널뛰기나 롤러코스터에 비유하는 것은 귀엽게 느껴질 정도다.

그날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5분, 하릴없이 떨어지는 모래알들을 하염없이 지켜본다. 감정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일까, 쌓이고 있는 것일까. 묵은 것들이 해소되는 것일까, 해소되지 못한 것이 묵어가고 있는 것일까. 솔솔 떨어져 나가는 것이, 실은 내가 붙잡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속삭이는 모래시계 앞에서, 잃었지만 잊을 수는 없는 존재들을 떠올린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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