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世說新語] [639] 선모신파(鮮侔晨葩)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2021. 9. 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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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현판 글씨 '선모신파(鮮侔晨葩)'. 20009년 당시 서울 관훈동 우림화랑이 근대 고서화 작품 140점(글씨 55점, 그림 75점)으로 '묵향천고(墨香千古)-신록의 향연' 전을 열 때 공개된 사진. /우림화랑

글씨도 글씨지만 적힌 내용에서 쓴 사람의 학문과 품격을 만날 때 더 반갑다. 어떤 작품은 필획에 앞서 글귀로 먼저 진안(眞贋)이 판가름 나기도 한다. 추사의 ‘선모신파(鮮侔晨葩)’ 현판을 보았을 때 그랬다. 찾아보니 이 구절은 진(晉)나라 속석(束皙)의 ‘보망시(補亡詩)’ 연작 중 ‘백화(白華)’ 시의 제3연에 들어있다.

“백화의 검은 뿌리, 언덕 굽이 곁에 있네. 당당한 아가씨는 꾀함 없고 욕심 없어. 새벽 꽃처럼 고와, 더럽힘 입지 않네(白華玄足, 在丘之曲. 堂堂處子, 無營無欲. 鮮侔晨葩, 莫之點辱).” ‘신파(晨葩)’는 이른 새벽에 이슬 맞고 피어난 꽃이다. ‘모(侔)’는 본받다, 가지런하다의 뜻이다. 글자로 풀면 곱기가 새벽 꽃과 똑같다는 의미다. 이슬에 젖어 갓 피어난 언덕 모롱이의 꽃을 보고, 욕심도 없고 속셈을 모르는 천진한 처녀의 순결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에게는 조금의 더러움도 범접할 수가 없을 것만 같다.

앞쪽 제2연은 멋진 선비에 관한 노래다. “백화 붉은 꽃받침은, 언덕의 모퉁이에. 어여쁜 선비님은 흙탕에도 물들잖네. 정성과 공경 다해, 힘써 노고(勞苦) 잊는구나(白華絳趺, 在陵之陬. 倩倩士子, 涅而不渝. 竭誠盡敬, 亹亹忘劬).” 붉은 꽃받침을 단 흰 꽃이 언덕 모퉁이에 피었다. 멋진 선비가 진흙탕 속에서도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듯한 모습이다. 그는 진심의 사람이어서 부지런히 힘을 쏟아 공부하고 일하면서도 힘든 줄을 모른다.

한종규(韓宗揆)는 권두경(權斗經·1654~1725)을 애도한 만사에서 이렇게 썼다. “유곡(酉谷)의 새벽 꽃 깨끗도 하니, 이 노인의 맑은 기운 모인 것일세. 회포는 환하기가 옥과 같았고, 문채는 빛남이 용과 같았네(酉谷晨葩潔, 斯翁淑氣鍾. 襟期瑩似玉, 文采燁如龍).” 이렇듯 새벽 꽃 같다는 말은 고결함을 나타내는 최고 찬사다.

긴 밤을 지새우고 이슬에 함초롬 젖어 꽃망울이 부픈다. 티끌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질 것만 같다. 발 아래 세상이 아무리 진창이어도 그를 더럽히지는 못할 것이다. 추사는 이 글씨를 써주면서 글씨를 받는 사람에게 당신이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덕담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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