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호박에 줄 그어 수박 만들기
[경향신문]
철 지난 바닷가는 황량하고 쓸쓸하다. 백로(白露) 지나 수온이 23도 아래로 떨어진 해수욕장은 폐장한 지 오래다. 체온과 10도 이상 차이가 나면 저체온증이 찾아올 수 있는 까닭에 사람들은 바닷물에 몸을 담그지 않는다. 하지만 간혹 우리는 백사장 한 모퉁이에서 의외의 기쁨과 마주치기도 한다. 가녀린 수박 넝쿨에서 주먹만 한 수박을 발견했을 때다. 분명 수박 씨앗은 여름 한 철 사람 위장관의 소화액 세례를 듬뿍 받고 서둘러 모래밭에 뿌리를 내렸을 게다. 이울어 가는 태양빛은 수박을 온전히 키우지 못하겠지만 수박 껍질에는 짙은 초록빛 띠가 선명하다.
박과 사촌인 수박은 약 1500만년 전에 지구상에 등장했다. 멜론이나 오이, 호박은 그 전에 분기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침팬지와 공통 조상에서 사람속 생명체가 분기한 때가 700만년 정도 되었으니 호박과 수박은 인간보다 한참 선배다. 인간이 박과 식물을 재배하기 전에는 잡식성 설치류나 초식동물이 갈맷빛 띠가 선명한 수박을 파먹고 씨앗을 퍼뜨렸으리라 추정된다. 번식을 지상 목표로 하는 박과(Cucurbitaceae) 식물은 비장의 무기를 갖추고 씨앗을 성숙시킨다. 오이 꼭지의 쓴맛을 기억하는가? 박과 식물들은 쓰디쓴 커큐비타신(cucurbitacin)을 만들어 동물로부터 어린 씨앗을 보호한다.
지금부터 4400년 전에 이미 북부 아프리카 사람들은 수박을 재배한 것으로 보인다. 수박을 그린 벽화가 발견된 것이다. 독일 뮌헨대학 레너 박사가 이끄는 국제 공동 연구팀은 여러 종의 수박 유전체를 분석한 후 수단(Sudan)인들이 재배하기 시작한 수박에는 쓴맛이 거의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 전 세계에서 재배되는 다양한 종류의 다디단 수박은 북아프리카에서 기원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들 수박의 속은 붉지 않고 박이나 호박처럼 하얗거나 샛노랬다.
과일의 단맛은 탄수화물에서 비롯된다. 식물은 단맛이 강한 포도당이나 설탕으로 광합성 산물을 변화시켜 과일 저장고에 축적했다. 모두 효소가 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달고 큰 수박을 선택했다지만 기실 우리가 한 일은 두 가지 돌연변이 유전자를 증폭시킨 데 불과하다. 그렇게 수박은 쓴맛의 커큐비타신 생합성 경로를 차단하는 한편 설탕과 포도당의 생합성은 크게 늘렸다. 흥미로운 점은 단맛을 높이는 유전자가 선택되는 동안 수박 속 붉은 색소를 만드는 유전자가 덩달아 활성을 띠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저간의 사정은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수박은 붉은색을 띠는 라이코펜에서 반응을 멈추고 당근의 주황색 색소인 베타카로틴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이런 시나리오는 2019년 중국 농림부 작물종자연구팀이 주도한 연구로 밝혀졌다. 예전 손수레에서 피라미드 모양으로 속을 파내 수박이 달고 잘 익었음을 과시하던 장사치들의 호객 행위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확실히 속이 붉고 선명한 수박은 달고 맛있다. 요즘은 붉은 수박 못잖은 당도를 내면서도 속이 노란 수박이 출시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수박은 달콤할 뿐만 아니라 밤눈 밝히는 비타민A 전구체인 라이코펜과 베타카로틴의 양도 풍부하다.
박과 식물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생물학적 기예를 발견하는데 바로 덩굴손이다. 박이나 수세미는 몸집에 비해 커다란 열매를 맺는다. 선택을 거듭하며 인간은 더욱 무거운 열매를 수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들 식물은 어떻게 중력을 거슬러 무거운 열매를 매달고 있을까? 덩굴손의 도움을 받아서다.
2012년 하버드 대학 과학자들은 오이의 덩굴손이 나무나 바위 같은 물체를 꽉 붙들지만 아래로 휘청거리지 않고 묵직한 열매를 지탱하는 원리를 ‘사이언스’에 보고했다. 이들은 덩굴손의 반을 시계방향, 나머지 반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꼬아 중간에서 그 둘을 잇는 방식으로 줄기가 최대한의 힘을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다고 설명했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박이나 포도나무의 덩굴손을 흉내 내어 스프링의 강도를 높이는 시도는 해볼 만한 일이다.
곡물에 버금가도록 박과 식물은 인류의 삶에 깊이 뿌리내렸다. 사람들은 단맛과 높은 영양소를 좇아 울퉁불퉁한 호박 모양에서 둥글고 초록 바탕에 검푸른 줄이 완연한 아름다운 수박을 생산해냈다. 수천만년이 지나도 할 수 없었던 식물의 일을 인간은 불과 몇백년 안에 해냈다. 우리는 이를 과학의 진보라 자부하지만 애써 저 속도의 뒤안길을 돌아보려 하지는 않는다. 마침내 가을이 왔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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