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프리즘] '빅 블러 시대'에 한눈을 팔자

- 2021. 9. 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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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분야 융합 일상화 시대
'한 우물 파기' 더이상 미덕 아냐
산업시대 수직적인 발전 아닌
디지털 시대 수평적 발전 필요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고사성어는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인데, 당나라 시인 이백의 일화에서 유래됐다. 이백이 어렸을 때 산속에 은거 중인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공부에 싫증이 나서 몰래 도망쳤다고 한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바늘을 만들기 위해 바위에 도끼를 열심히 갈고 있는 노인을 보게 됐다. 이백이 실소를 터뜨리자 노인이 이백을 꾸짖으며 “도중에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이 도끼도 바늘이 될 수 있다”고 했고 이 말에 감명받은 이백은 그 길로 발길을 돌려 학업을 마쳤다고 한다.

마부작침처럼 꾸준히 한 우물을 파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이 쏟아지는 디지털 전환 시대에서는 ‘한 우물만 파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우물 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빅 블러’(Big Blur)의 시대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안준모 고려대 교수 과학기술정책학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으로 시작된 산업혁명 시대는 수직적인 기술 발전을 가져왔다. 하나의 기술이 나오면 그 기술을 발전시켜 다음 세대의 기술이 나오는 선형적인 발전이 이루어져 온 것이다. 반도체를 예로 들면 4MB 램이 개발되면 집적도를 더 높인 8MB, 16MB, 32MB 램이 개발 되는 식이다. 물론 공정기법에서 급진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전자공학이라는 분야에 한정된 변화가 주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종래의 수직적 발전이 수평적인 발전으로 변화하고 있고, 이로 인해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변화가 펼쳐지고 있다. 2019년 자율주행 데이에서 자율주행 기술을 뽐내고, 2020년 배터리 데이에서 혁신적인 배터리 생산계획을 발표했던 테슬라는 올해 8월 말 ‘인공지능(AI) 데이’를 통해 인간형 로봇 ‘테슬라 봇’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테슬라가 단순한 전기차 회사가 아니라 토털 소프트회사이자 로봇제조사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질병으로 분류했던 게임이 치료제가 되기도 했다. 아킬리 인터랙티브는 일본 제약회사 시오노기와 함께 ‘인데버알엑스’(EndeavorRX)라는 게임을 개발했는데 공중에 떠다니는 호버보드를 탄 캐릭터와 함께 여행하는 게임이다. 인데버알엑스는 행동아동신경학에 기반해 개발됐으며,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앓고 있는 아동의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인정받아 작년 6월 정식 치료제로 승인받았다. 의료계에서 천대받던 게임이 치료제가 된 것이다.

이 같은 빅블러 현상은 해외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LG전자는 세계 3위 자동차 부품업체 캐나다 마그나 인터내셔널과 ‘LG 마그나 이파워트레인’이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했는데, 미국 애플이 자율주행 전기차 사업을 공식선언한 이후 애플카 파트너로 급부상하고 있다. 가전회사와 스마트폰 회사가 모빌리티 회사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메신저에서 게임, 만화, 골프부킹, 그리고 금융서비스까지 다양한 업종을 넘나들고 있는 카카오는 어떠한가. 카카오 같은 디지털 플랫폼 기업이 무슨 업종의 회사라고 쉽게 분류할 수 있을까.

산업시대가 수직적 발전의 시대였다면 디지털 시대는 다양한 분야가 융복합되는 수평적 발전의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수평적 발전 시대에는 마부작침 같은 ‘한 우물만 파기’가 미덕이 아닐 수 있다. 수평적 발전을 위해서는 발전 궤적이라는 경로성에 갇히지 않는 창의적인 사고가 중요하다. 기술혁신의 아버지로 불리는 슘페터가 강조했듯이 새로운 조합은 창의적 혁신의 원천이 된다. 창의성이 분야를 넘나드는 유연함, 이질적인 분야에서 얻는 영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우연히 들었던 교양수업(캘리그래피)을 통해 서체와 그래픽에 관심을 갖게 됐고, 결과적으로 애플의 차별성으로 꼽히는 고유한 글씨체가 탄생하게 됐다. 다양한 분야가 융합돼 경계가 허물어지는 빅 블러의 시대에서는 한눈팔기는 오히려 미덕이 될 수 있다. 자기 분야에 대한 고집보다는 한눈을 팔고 유연하게 생각하는 수평적 발전이 필요하다.

안준모 고려대 교수 과학기술정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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