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침대축구

차준철 논설위원 2021. 9. 8.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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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7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레바논의 2022 카타르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경기 도중 레바논 선수가 그라운드에 드러누워있다. 수원 | 권도현 기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침대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일 것이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인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 교외에 살았는데, 나그네들을 집으로 초대해 철제 침대에 누이고는 키가 크면 다리를 자르고 작으면 몸을 늘려 죽이는 악행을 일삼았다. 여기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심리학 용어가 생겨났다. 제 기준에만 맞춰 타인의 생각을 억지로 바꾸거나 꿰맞추려는 아집과 횡포를 말한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 자신이 저지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임을 당한다. 독선과 독단의 말로다.

<침대 위의 세계사>를 쓴 영국 고고학자 브라이언 페이건에 따르면 침대는 사람들이 인생의 3분의 1을 보내면서도 언제나 뒤쪽에 숨겨져 있고 언급하기를 망설이는 사적인 공간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부의 상징이자 신분과 권력을 드러내는 물건이기도 했다.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은 황금 침대에 누운 채 묻혔고 그리스 부자들은 침대에서 사후세계로 인도됐다고 한다. 또 침대는 정치의 무대로도 쓰였다. 루이 14세는 침대에서 판결을 내리며 프랑스를 통치했고, 윈스턴 처칠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종종 침실에서 영국군을 지휘하곤 했다.

침대가 스포츠에서도 익숙하게 통용되고 있다. ‘침대축구’는 공식 용어는 아니지만, 어지간한 팬이라면 안다. 90분 경기 시작부터 이리저리 공을 돌리고, 유니폼만 스쳐도 기겁하며 쓰러져 그라운드에 드러눕는다. 응급처치를 한참 받다 들것에 실려 경기장 밖으로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뛰어온다. 비기기를 목표로 세우고 시간을 끄는 게 침대축구의 전형이다. 지난 2일과 7일 한국과 2022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맞붙은 이라크와 레바논이 어김없이 보여줬다.

다들 침대축구를 탓한다. 손흥민도 이라크전 직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시간 끌기를 하면 축구에 발전이 없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발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어차피 침대축구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침대축구는 전력이 약한 팀이라면 누구나 택할 수 있는 고육책일 수 있다. 상대의 침대축구만 탓하기에 앞서 그것을 깨뜨릴 방책을 찾는 게 먼저다. 침대축구를 핑계로 삼지 않으면 좋겠다.

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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