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사진 대가 강운구가 포착한 '그때 그 사람들'

노형석 2021. 9. 8.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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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겨울 어느날, 당시 67살의 사상가 함석헌(1901~1989)은 칼바람 부는 서울 원효로 강변도로 철조망 앞에서 눈 감고 사진을 찍었다.

"제가 찍은 함 선생 사진들이 상당수 있지만 60년대 말 한강변 원효로에 댁이 있을 때 처음 찾아가 찍은 이 사진이 기억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요. 한강에 산책을 자주 간다고 하셨어요. 그날도 한강에 가자면서 앞장섰는데, 길목인 강변로에 철조망이 처져 막힌 광경을 보고 당황해하셨어요. '언제 막혔지' 중얼거리셨죠. 지금은 차량 전용로지만, 그때는 차량들이 별로 없어 그냥 건너다녔던 모양입니다. 한강 가까이는 못 가고, 찬 바람이 몰아치는데, 눈 감고 철조망을 움켜쥐고 가만히 계셨어요. 그분 뒤로 제2한강교(마포대교)가 보이고. 그때 바로 찍었죠. 그때부터 예술가나 명사들 사진들을 찍어서 언젠가 전시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사진발' 잘 받는 분이라 꽤 많이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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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고은사진미술관 '사람의 그때' 인물사진전
1968년 함석헌 선생부터 찍어온 유명인사 154명
1968년 마포 강변도로 앞에서 찍은 생전의 함석헌.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1968년 겨울 어느날, 당시 67살의 사상가 함석헌(1901~1989)은 칼바람 부는 서울 원효로 강변도로 철조망 앞에서 눈 감고 사진을 찍었다. 백발 휘날리며 철조망을 부여잡은 그이의 뒤쪽으로 당대 서울 마포 한강변의 황막한 풍경들이 카메라 앵글에 적나라하게 잡혔다. 텅빈 강변도로와 얼어붙은 한강과 마포대교의 다릿발, 지금은 아파트로 뒤덮인 도화동 언덕배기의 자잘한 나무들….

이 한장의 사진은 한국 다큐사진계의 원로 대가 강운구(79)씨의 작품이다. 26살에 함석헌을 처음 만나 찍었다고 한다. 널리 알려진 선지자나 선인 같은 고인의 사진들과 전혀 다른 도회적 배경의 풍경사진 같은 인상을 준다. 1970년대 ‘씨알의 함성’을 외치며 민권 회복과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길로 내달려갔던 고인의 간고한 삶을 예고하는 것같기도 하다.

강 작가가 50여년간 간직해온 강변도로의 함석헌 사진을 전시에 처음 내보인다. 부산 해운대 고은사진미술관에서 11일부터 12월26일까지 ‘사람의 그때’란 제목으로 열리는 인물사진 전. 경주 남산과 이 땅의 문화유산들을 선 굵은 정통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포착하며 일가를 이룬 작가가 50여년간 인연 맺은 예술가와 유명인사 154명의 인물사진 163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제가 찍은 함 선생 사진들이 상당수 있지만 60년대 말 한강변 원효로에 댁이 있을 때 처음 찾아가 찍은 이 사진이 기억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요. 한강에 산책을 자주 간다고 하셨어요. 그날도 한강에 가자면서 앞장섰는데, 길목인 강변로에 철조망이 처져 막힌 광경을 보고 당황해하셨어요. ‘언제 막혔지’ 중얼거리셨죠. 지금은 차량 전용로지만, 그때는 차량들이 별로 없어 그냥 건너다녔던 모양입니다. 한강 가까이는 못 가고, 찬 바람이 몰아치는데, 눈 감고 철조망을 움켜쥐고 가만히 계셨어요. 그분 뒤로 제2한강교(마포대교)가 보이고…. 그때 바로 찍었죠. 그때부터 예술가나 명사들 사진들을 찍어서 언젠가 전시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사진발’ 잘 받는 분이라 꽤 많이 찍었습니다.”

사실 출품작 중 함석헌 사진은 예외적인 것이고, 대부분은 화가, 문인, 비평가 등 예술인들의 초상사진들이다. 인물사진은 그 사람의 그때를 증명하는 사진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찍었다고 작가는 털어놓는다. 실제로 전시될 작품들은 시공간적 배경이 선연하게 와닿는 것들이 많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2008)는 1976년 서울 정릉의 허물어진 집의 벽체에 뻥 뚫린 구멍 속에서 정면을 주시하는 모습이며, 원색의 산 그림을 평생 그린 박고석(1917~2002)은 1974년 서울 원남동 작업실에서 붓 들고 형형한 눈빛으로 사진가를 바라본다. 1983년 충북 수안보 화실에서 아이처럼 웃는 말년의 장욱진(1917~1990)과 1975년 눈을 낮게 뜨고 담담하게 담배를 피우는 소설가 최일남의 40대 시절 모습 등은 인물의 내면적 개성이 물씬하다. 전시를 앞두고 공개한 작가 노트 말미에 강 작가는 이렇게 썼다. ‘성격상 내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분들도 더러 있었으나, 사실은, 대개는 내가 그이들 앞에서 쩔쩔맸다. 이 사진들은 그 쩔쩔맸던 결과이다…. 시간은 시계 속에 그대로이고 사람들은 지나갔다 . 흐르는 것은 사람이다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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