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 여덟살..열두 살까지 선 그릴 것"
딸의 낙서에서 영감 얻고
군사독재 억눌림 표현 위해
화면 등지거나 뒤에서 그려
세계 회화사서 유일한 작업
45년간 묵묵히 그린 선
이제야 날개 돋친 듯 팔려
서울 갤러리현대 개인전에서 만난 그는 "내 신체와 재료, 평면(캔버스)이 자연스럽게 만나 이룬 작품"이라며 "회화 바깥에서 회화를 본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대상을 그리는 일반적 회화와 달리 그의 몸 궤적이 예술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1976년 서울 출판문화회관에서 '신체의 풍경'을 처음 발표한 후 45년간 이 작업을 이어왔다. 화면 뒤에서 팔을 뻗어 선을 그리는 '신체의 풍경 76-1' 연작, 캔버스를 등진 채 선을 그리는 '신체의 풍경 76-2' 등을 두고 "저것도 예술인가"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묵묵하게 그의 흔적을 남겨왔다. 그러나 2018년 세계 유명 화랑인 페이스 갤러리 베이징점 개인전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상황이 '급반전'했다. 화면 옆에서 붓을 들고 팔 길이만큼 휘저어 선을 그려 하트 모양을 이룬 '신체의 풍경 76-3' 연작이 경매에서 1억원을 훌쩍 넘기고 '완판' 행진을 이어갔다. 이번 신작 회화 34점도 전시 시작 전에 이미 완판됐다.
작품이 외면받을 때도 그는 "화면 뒤에서 혹은 화면을 등지고 그린 사람은 세계 회화사에서 나밖에 없다"고 자신하면서 살았다. 다양한 색채 하트를 모은 '신체의 풍경 76-3' 연작 12점 앞에서는 "내 소원이 큰 뮤지엄에 100호 하트 100점을 거는 것이다. 앤디 워홀(미국 팝아트 거장)이 보면 울고 갈 것"이라고 당찬 포부를 드러냈다.
지금 미술계를 뒤흔들고 있는 그의 선은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작가는 "내 딸의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걷기 시작한 딸이 크레용을 빨다가 뒤뚱거리면서 쓰러져 벽에 선이 그어졌는데 벽에 다가가 손이 닿는 만큼 선을 그리더라고요. 말리지 않고 선을 마음껏 긋도록 했죠. 아이들이 어릴 적 쓰던 테이블에도 선이 많아요."
어린이를 좋아해 서울 성수동 헬로우뮤지엄에서 미술 수업을 한 그는 "내 작업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작품이 친구가 되어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했다. 1970년대 군사 독재가 제한하는 일상의 괴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선을 긋기도 했다. 손목과 팔꿈치를 부목으로 고정하고 이를 하나둘 풀면서 선을 그리는 '신체의 풍경 76-4' 연작은 억압받는 자의 생존 흔적이었다. 1979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쪼그려 앉아 분필을 바닥에 대고 좌우로 선을 그리고 전진하면서 두 맨발로 그 선을 지우는 퍼포먼스 '달팽이 걸음'도 같은 맥락이다.
유년 시절부터 호기심이 많아 "왜요"라는 질문을 입에 달고 살았던 그는 홍익대 데생 시험 때 아폴로 조각상 뒤통수를 그려 합격했다. 당시 추상미술 거장 김환기 미대 학장이 이유를 묻자 "특별한 걸 그리고 싶었다"고 답했다. "중학교 때부터 새로운 회화를 탄생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철학과 현상학을 공부하고 미술 밖에서 미술을 봤고 신체 드로잉을 하게 됐죠."
80세를 '여덟 살'로 표현하는 작가는 "아직 여덟 살이니까 열두 살(120세)까지는 선을 그을 수 있다"고 했다.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작업에 전념하는 그가 택배 상자에 그린 드로잉 20여 점은 두가헌 갤러리에 걸려 있다. 전시는 10월 31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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