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감시]"이름 훔쳐도 검증시스템 없다" 기관·연구원 명의 도둑맞은 한국파스퇴르연구소

고재원 기자 2021. 9. 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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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연구자가 주축으로 참여한 C형간염 억제제 연구 논문이 연구에 참여하지도 않은 연구자의 이름을 도용해 철회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름을 도용 당한 연구자가 학술지 측에 직접 이 사실을 알린 후에야 학술지 측에서는 이 사실을 인지한 것으로 드러났다. 과학계와 의학계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논문 출판 과정에 명의도용을 걸러낼 만한 시스템이 없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나온다.

9일 논문 감시 사이트 ‘리트랙션워치’에 따르면 바이오 기업인 제이투에이치바이오텍이 제1 저자, 한양대와 중원대 교수가 교신저자를 맡고 한국파스퇴르연구소 연구자들이 참여한 연구팀이 지난 1월 17일 국제학술지 ‘효소 억제와 의학 화학 저널(Journal of Enzyme Inhibition and Medicinal Chemistry)’에 발표한 C형간염 바이러스 침투 억제제 논문이 저자 명의도용을 이유로 철회된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논문은 바이러스성 만성질환인 ‘C형간염’과 관련된 것으로 인체 내 바이러스 침입을 막는 새로운 억제제로 ‘티오펜 요소 유도체’가 가능성을 보였다는 내용을 담았다. ‘티오펜 우레아’라는 유도체를 합성하고 세포 수준에서 실제 침투를 억제하는지 관찰했더니, 효과적인 항바이러스 특징을 보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해당 논문은 발표 약 5개월 만인 지난 6월 1일 돌연 철회됐다. 해당 학술지 편집부는 철회 사유로 “마크 윈디쉬 파스퇴르연구소 연구원의 이름이 동의없이 논문 저자 목록에 올랐다”며 “파스퇴르연구소의 데이터도 기관의 허락이 없이 저자들이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들었다. 편집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함께 논문 저자에 오른 파스퇴르연구소 최인희 연구원도 이름이 무단으로 도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름도 알만 한 연구소와 소속 연구원들의 기관명과 이름이 한꺼번에 도용된 셈이다. 

한국파스퇴르연구소와 한양대 약대, 제이투에이치바이오텍, 중원대에 소속된 연구자로 구성된 공동 연구팀이 지난 1월 17일 국제학술지 ‘효소 억제 및 의약 화학 저널’에 발표한 C형간염 바이러스 침투 억제제 관련 논문이 허위 저자 등록으로 지난 6월 1일 철회됐다. 저널 홈페이지 캡쳐

윈디시 연구원은 자신의 이름이 논문에 나간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고 학술지 측에 철회를 요청했다. 파스퇴르연구소 관계자는 “윈디쉬 연구원이 직접 논문 철회 요청을 학술지 측에 했다”며 “함께 저자로 이름을 올린 파스퇴르연 소속 최인희 연구원도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이름이 올라갔다”고 말했다. 윈디쉬 연구원과 최 연구원 외에 논문에 이름을 올린 저자들은 학술지 편집부의 지적들을 인정하고 논문 철회에 동의했다. 

과학계와 의학계에서 연구자가 논문을 하나 쓰는 데는 통상 수 개월에서 수 년이 걸린다. 연구자들은 연구 목적과 과정, 결론, 연구 결과의 의미 등을 논문에 담아 쓰고 게재할 학술지에 투고하면 학술지 편집인들은 이 연구와 동일한 분야의 저명한 전문가들에게 평가를 맡긴다. 연구 결과가 과연 객관적인지, 신뢰할 만한지, 학술지에 게재할 만큼 의미가 있는 연구결과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의 평가를 거치는 과정이다. 통상적으로 이런 과정들을 엄격히 거쳐 통과한 논문만이 학술지에 실리고 학술 논문으로서 최종 인정을 받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논문 제출자가 논문의 저자의 구성을 임의로 정할 수 있으며 이를 검증할 만한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일한 검증절차는 이메일이다. 논문 제출 시 저자로 이름 올린 사람들의 이메일을 함께 제출해야 한다. 이메일을 통해 저자들에게 논문 제출 소식을 알리고 연구 참여 여부를 확인한다. 이번 논문 철회는 이 부분에서 허점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라는 평가다. 

과학계 한 관계자는 “이메일에 대한 무응답은 보통 긍정으로 간주한다”며 “그렇기 때문에 논문 제출자가 이메일을 허위로 집어넣고 학술지 측에서 해당 이메일을 보내 답이 없으면 논문이 출판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런 검증 구조가 형성된 것은 논문에 저자로 이름을 올리는 것이 기본적으로 연구자에게 득이 되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논문에 이름을 넣게 되면 연구자 입장에서 나쁠 것이 없다”며 “별 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자로 넣어주면 ‘땡큐’지 ‘왜 날 넣었어’라고 하는 경우는 보통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내가 엄청난 대가인데 수준 떨어지는 연구를 제출하고 내 이름을 넣어서 명예가 실추될 수준이 아니면 다 좋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명의도용은 연구에 사용된 데이터의 신뢰성을 얻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파스퇴르연의 허가 없이 관련 데이터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다른 과학계 관계자는 “데이터 사용과 관련해 합의가 전혀 되지 않았고,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논문을 낸 것으로 보인다”며 “데이터를 합법적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하려고 무단으로 이름을 넣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거짓 이메일을 통한 허위 논문출판 사건은 2018년 중국에서도 발생했다. 논문 제출자는 제출 시 논문을 살펴볼 전문가(추천 리뷰어)도 추천한다. 학술지 편집인에 따라 해당 전문가를 동료평가(피어리뷰) 전문가에 넣을지 말지 결정한다. 논문 제출자가 추천 리뷰어의 이메일 주소를 허위로 제출해 본인의 논문을 본인이 살피고 출판이 결정되는 사건이 수 차례 발각됐다. 지난 2012년에는 국내에서 동아대 교수가 같은 이유로 논문 24편을 무더기로 철회 당했다. 

학술지 편집인으로 활동 중인 또 다른 관계자는 “허위 이메일 정보를 넣고 논문을 제출하면 명의를 도용당한 연구자 입장에서는 이를 인지할 수가 없다”며 “거짓으로 작성된 이메일 정보를 걸러내는 시스템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지메일 등은 허위 이메일 정보일 가능성이 많아 소속 기관이나 학교 이메일을 쓰는 경우에만 논문 심사를 허락하는 자체적 방안을 도입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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