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여자 현상] 20대 젠더 갈등에서 '정체성 정치' 보인다

국승민 2021. 9. 8.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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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소수자, 무임승차, 신뢰 등을 둘러싼 20대 내부의 정치적 갈등은 단지 페미니즘을 둘러싼 싸움이라기보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체성 정치와 유사한 양상이다.
6월17일 노예해방일(6월19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법에 서명한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 ⓒUPI

지난해 6월 미국에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 운동이 한창일 때 한국의 어떤 인터넷 사이트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미국에서 보는 정치적 논란이 한국 웹상에서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미국의 프로스포츠가 BLM 운동을 지지하기에 곧 망할 것이라는 확신에 찬 글들이 인상 깊었다. 젊은 남성을 위주로 구성된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BLM 운동에 비판적이었고, 젊은 여성 위주의 여초 커뮤니티는 BLM 운동을 응원하는 구도가 흥미로웠다.

미국의 ‘정체성 정치’ 이슈가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논쟁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정치적 올바름의 비판자로 유명한 캐나다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에 대한 평가, ‘디즈니의 인어공주에 흑인 여성 캐스팅’이 적절한지 등을 둘러싼 논란이 한국에서도 뜨겁게 진행된 것이다. 서구권의 정체성 정치를 둘러싼 이 같은 갈등을 살펴보면, 한국 정치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미국 여론조사에서 바이든과 트럼프 지지자를 가장 잘 구분할 수 있는 질문은 무엇일까? ‘오늘날 미국에서 흑인은 얼마나 많은 차별을 경험하고 있는가?’이다. 흑인이 사회경제적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믿을수록 바이든 지지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 반대의 경우는 트럼프 지지자이기 쉽다. 2020년 미국 대선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인 미국 선거 조사(American National Election Studies·ANES)에 따르면, ‘흑인이 전혀 혹은 거의 차별받지 않는다’고 응답한 유권자의 85.1%가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 ‘흑인이 아주 많은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응답한 유권자 중에선 7.8%만이 트럼프를 지지했다. 인종차별의 현실을 인정하느냐 여부가 전혀 다른 정치관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한국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한국의 유권자도 미국과 유사하게 갈리기 시작했다는 징후가 포착된다. 차이가 있다면, 전체 유권자가 아닌 20대 유권자 가운데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인종차별 대신 젠더 차별에 대한 인식이 갈등의 전선이다. 이번 〈시사IN〉 웹조사에서 그 차이를 살펴봤다.

‘한국에서 여성은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있다’라는 문항을 보자. 여성이 차별받는다고 ‘매우 동의’한 20대 응답자의 60.2%가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을 지지했다. 전혀 동의하지 않은 20대 응답자들은 13.2%만이 국정에 긍정적이었다.

또한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에 ‘매우 동의’한 20대 응답자 중 74.6%가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을 지지한 반면 ‘전혀 동의하지 않은’ 응답자 가운데서는 15.9%만 국정에 긍정적이었다. 무려 60%포인트에 가까운 차이다(〈그림 1〉 참조).

무임승차에 민감할수록 페미니즘에 부정적

더욱 주목할 점은 20대 내부의 성별 갈등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태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젠더·페미니즘에 대한 태도는 진보와 보수적 이념의 분화와 강한 상관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를 알기 위해 두 가지 지수를 사용했다. 첫째는 〈시사IN〉 제604호 커버스토리 ‘20대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에서 만든 페미니즘 지수다.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를 묻는 질문 6개를 통해 최저 -12점에서 최고 12점에 이르는 지수를 구성했다. 낮은 점수일수록 페미니즘에 부정적이고 높은 점수일수록 페미니즘에 긍정적이다.

두 번째는 진보 지수다. 이번 조사에서는, ‘성장 대 복지’부터 ‘차별금지법 찬성 대 반대’에 이르는 11개의 정책 선호 질문을 던졌다. 모든 질문에서 진보적 응답을 할 경우 +11점, 모두 보수적 응답을 할 경우 -11점이다. 〈그림 2〉를 보면, 페미니즘 지수와 진보 지수가 강한 ‘양의 상관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페미니즘에 긍정적일수록 진보 지수도 증가하는 모양새다. 20대에 국한해서 보자면 페미니즘 지수 -12점의 응답자들은 평균 -4.59의 진보 지수를 보여준 반면, 페미니즘 지수 +12점의 응답자들은 평균 3.76의 진보 지수를 기록했다. 페미니즘 지수가 가장 높고 낮은 사람은 11개 정책 질문 중 평균 8개에서 응답이 달랐다. 이쯤 되면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가 20대의 정치적 균열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시민들의 견해를 깊게 가르는 사안일수록, 깊숙이 들여다보면 다면적 갈등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정체성 정치를 둘러싼 갈등이 치열하다. 이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이론적 틀로 한국 20대의 페미니즘 관련 갈등을 분석해보기로 했다. 데이터 분석 과정에서 세 가지가 눈에 띄었다.

‘무임승차에 대한 태도’ ‘소수자와의 연대감’ 그리고 ‘신뢰’. 미국과 서유럽의 포퓰리스트들은 ‘국가의 지원이 무임승차하는 사회적 소수자에게 간다’라고 믿는다. 이 지역의 진보세력은 ‘무임승차에 대한 지나친 우려 때문에 사회적 소수자가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무임승차에 대한 태도는 소수자에 대한 태도 및 정치적 성향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이런 현상이 한국에서 확인될까? 무임승차에 대한 태도가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와 연관되어 있을까?

이를 검증해보기 위해 미시간 대학의 샬럿 카바예 교수의 측정법을 빌려보았다. 응답자에게 다음 두 가지 중 더 문제가 되는 상황을 고르라고 요청했다. 하나는 ‘정부 기관의 실수로 정부 혜택을 받아서는 안 될 사람이 받는’ 경우, 다른 하나는 ‘혜택을 받아야 하는데 못 받는’ 경우다. 전자를 ‘더 큰 문제’로 보는 사람은 무임승차에 민감한 성향으로 볼 수 있다. 후자가 더 큰 문제라고 하면 보호의 사각지대에 민감한 사람이다.

이번 〈시사IN〉 조사에서는 응답자들의 ‘무임승차 민감 지수’를 측정하기 위해, 대조적인 두 가지 상황 중 어느 쪽이 더 큰 문제인지 질문했다. 첫째, ‘기초생활수급자 지원 자격이 없는데 급여를 받는 경우’ 대 ‘유자격자이지만 급여를 못 받는 경우’. 둘째, ‘대학입학 능력이 없는데 합격하는 경우’ 대 ‘능력은 있지만 불합격하는 경우’. 셋째, ‘난민 자격이 없는데 자격을 부여받는 경우’ 대 ‘난민 자격 보유자이지만 자격을 받지 못하는 경우’.

두 상황은 ‘자격, 능력이 없는데도 혜택을 받는 경우’와 ‘자격, 능력이 있는데도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로 나뉘어 있다. 여기서 ‘전자(자격, 능력이 없는데도 혜택을 받는 경우)에 더 큰 문제가 있다’를 선택한다면, ‘무임승차에 민감’한 것으로 설정했다. 위의 세 가지 상황에서 모두 ‘전자가 더 큰 문제’라고 답하면 그의 ‘무임승차 민감 지수’는 +3점이다. 모두 ‘후자(자격, 능력이 있는데도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선택한 사람의 무임승차 민감 지수는 -3점으로 설정했다. 점수가 높을수록 무임승차에 민감하다.

〈그림 3〉은 무임승차 민감 지수와 페미니즘 지수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20대에서 뚜렷한 ‘음의 상관관계’가 드러난다. 무임승차가 문제라고 생각할수록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나타난다. 후자를 일관되게 선택한 응답자(-3점)의 페미니즘 지수는 평균 2.18점이었다. 반면 세 가지 상황 모두에서 ‘전자가 더 큰 문제’라고 답한 응답자들은 페미니즘 지수에서 평균 -3.94점을 기록했다. 페미니즘에 부정적이라는 의미다.

개별 질문을 봐도 똑같은 패턴이 보인다. ‘난민 자격이 있는데 난민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 경우가 더 큰 문제’라고 답한 응답자들의 페미니즘 지수는 평균 0.9점(페미니즘에 약간 긍정적)이다. 반면 ‘난민 자격이 없는데 난민 지위를 받는’ 무임승차를 더 큰 문제로 본 사람들의 페미니즘 지수는 평균 -6.3점(페미니즘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소수자와의 일체감도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와 매우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다. 소수자와의 일체감에 관한 이론은 미국 소수인종의 정치적 성향을 설명하는 데서 비롯됐다. 시카고 대학의 마이클 도슨 교수는 ‘흑인들이 왜 통일된 투표를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연결된 운명(linked fate)’이라는 개념을 고안해냈다. 다른 흑인들이 경험하는 일들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강하게 믿을수록 개인보다는 흑인 전체의 이득을 위한 투표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을 한국에 적용해본다면 소수인종 대신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한국의 사회적 소수자들이 겪는 일을 내 일처럼 느낄수록’ 페미니즘에 더욱 호의적인 감정을 가진다고 볼 수 있을까? 이번 조사에서는 대체로 그렇게 나타났다.

20대 응답자 가운데, 한국 소수자들이 겪는 일을 ‘매우 내 일처럼 느낀다’고 답변한 사람들의 페미니즘 지수는 평균 4.85점이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변한 사람들의 페미니즘 지수는 -6.82점이다. 아주 강한 ‘양의 상관관계’가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검증해볼 것은 ‘사회제도에 대한 신뢰’와 페미니즘 사이의 관계다. 미국과 서유럽을 통틀어서 ‘소수자에 대한 반감’이 셀수록 ‘제도 및 사회를 불신’하고 포퓰리즘 성향이 강한 것으로 여러 연구에서 나타난 바 있다. 이를 한국에 적용한다면, 사회에 대한 신뢰와 페미니즘 사이에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예컨대 페미니즘(서구라면 소수자)에 대한 강한 반감은 ‘페미니즘이 제도권의 주류’라는 인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는 사회제도에 대한 낮은 신뢰로 연결된다. 역으로 사회제도에 대한 낮은 신뢰가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사회 일반에 대한 신뢰를 측정하기 위한 질문은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만하다’로 설정했다. ‘우리나라에서 법은 공정하게 집행되고 있다’란 질문으로는 응답자들의 사회제도에 대한 신뢰수준을 측정해보려고 했다. 그 결과인 〈그림 4〉를 보면, 사회에 대한 신뢰수준이 낮은 20대 남성일수록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 역시 높은 경향이 나타난다. ‘사람들이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만하다’는 질문에 가장 낮은 단계의 신뢰수준으로 응답한 20대 남성들은 평균 -9점의 페미니즘 지수를 나타냈다. ‘법은 공정하게 집행되고 있다’에 매우 낮은 신뢰를 보인 20대 남성들의 페미니즘 지수는 -8.6점이었다.

트럼프 지지자와 20대 남성의 상관관계?

20대 여성의 경우에도, 사회적 신뢰수준과 페미니즘 지수는 강한 상관관계를 보였다. 그 방향은 동년배 남성과 정반대였다. ‘다른 사람들을 전혀 믿지 못한다’는 낮은 사회적 신뢰수준의 20대 여성 응답자는 평균 4.79점의 매우 높은 페미니즘 지수를 기록했다. 사회에 대한 신뢰수준이 매우 높은 20대 여성 응답자의 페미니즘 지수는 평균 2.38점에 불과했다.

20대 남성의 경우 사람에 대한 신뢰가 낮을수록 페미니즘에 더욱 부정적이었는데, 동년배 여성은 정반대 패턴을 보인 것이다. 세상에 믿을 대상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나마 신뢰 가능한 것이 여성에게 페미니즘이라면, 남성에겐 반페미니즘으로 나타나는 형국이다.

무임승차, 소수자와의 일체감, 그리고 신뢰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본 20대는 그 정치적 갈등의 양상이 오늘날 미국과 서유럽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페미니즘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지닌 20대들은 무임승차가 문제라고 인식하며, 사회적 소수자와 일체감이 낮고, 사회에 대한 신뢰수준도 낮은 경향을 보인다. 미국의 트럼프 지지자나 서유럽의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 지지자와 공유하는 점이 많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20대들은 정부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것을 문제로 생각하고, 사회적 소수자의 경험을 자신의 일처럼 느끼려는 성향이 강하며, 사회 일반에 대해 높은 신뢰수준을 갖고 있다. 미국의 바이든 지지자, 서유럽의 다문화주의 지지자들과 비슷한 성향이다. 20대 내부의 정치적 갈등은 단순히 페미니즘을 둘러싼 싸움이라기보다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체성 정치와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2018년 6월, 내전이 발생한 고국을 탈출해 말레이시아에 체류하던 예멘인들이 제주도에 입국했다. ⓒ시사IN 이명익

이번 〈시사IN〉 조사 결과들로 정체성 정치가 한국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고 할 수 있을까? 일단 〈그림 2〉에서 페미니즘 지수와 진보 지수의 관계를 보면 모든 세대에 걸쳐 페미니즘이 중요한 정치 이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무임승차, 소수자와의 일체감, 신뢰 등의 변수를 통해 한국이 서구와 비슷한 ‘정체성 정치’의 단계를 겪고 있는지는 아직 모호하다. 20대만 보면 격렬한 정체성 정치가 작동 중이지만, 30대 이상은 20대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이번 조사에서 나타났다. 30대 이상에서는 앞의 세 가지 변수가 페미니즘 지수와 큰 상관관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 국정 지지도 역시 20대와 달리 30대 이상에선 페미니즘과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

30대 이상의 유권자 층에서는 미국이나 서유럽처럼 ‘정체성 정치’의 갈등 양상이 나타난다기보다는, 정치권에서 페미니즘이 계속 이슈로 떠오르다 보니 유권자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에 맞춰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까지 결정하는 모양새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20대 유권자들은 페미니즘 및 젠더 갈등을 통해 정치권과 사회에 영향을 미쳐왔다. 이들은 앞으로 계속 성장하고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나갈 세대다. 그렇다면 20대가 사회적 소수자, 무임승차, 신뢰 등을 둘러싸고 형성한 갈등 양상이 앞으로 한국 정치의 구도를 바꾸고 이에 따라 진보와 보수의 의미까지 재정의할 가능성이 크다.

국승민 (오클라호마 대학 정치학과 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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