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5년만에 신작 장편 '작별하지 않는다' 출간

서정원 2021. 9. 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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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에 맞서..삶에 대한 지극한 의지
제주 4·3 생존자들 소재
시리도록 미려한 필치로
역사적 비극성 부각시켜
2014년 여름 소설가 한강(51)은 꿈을 꿨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아픔을 다룬 책 '소년이 온다'를 내고 두 달 정도 지나서였다. 눈 내리는 벌판에 늘어선 수천수만의 검은 통나무, 나무들을 묘비 삼아 만들어진 무덤들, 그리고 무덤가로 밀려드는 바닷물을 그는 보았다. '밀물이 들어오지 않은 곳의 뼈들이라고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주변엔 도와줄 사람도, 흙을 퍼낼 삽도 없었다. 절망해 물속을 달리다가 간신히 깨어났다.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로 시작하며 한 폭의 수묵화를 그리는 신작 장편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 꿈에서 태어났다.

광주의 악몽인 줄로만 알았던 꿈은 국가 폭력에 대한 성찰, 인간 본성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국사의 또다른 비극 제주 4·3 사건의 상흔을 응시하고 치유를 모색한다. 출간을 이틀 앞둔 7일 온라인 간담회에서 한강은 "제노사이드와 같은 일들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언제나 무서운 질문으로 현재와 이어져 있다"며 "절멸과 혐오의 메커니즘을 더 끈질기게 들여다보려 했다"고 말했다.

작가가 꾸었던 꿈을 주인공 '경하'가 똑같이 꾸며 작품은 시작한다. 경하는 잡지사 기자 출신 소설가로 한 도시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해 쓰고 고통스러워한다. "마치 몸이 절반으로 갈라지듯, 모든 사적인 순간들에까지 그 책의 그림자가 어른거려서"다. 길을 가다가도 저격수의 총을 맞을까 불안하고, 군복 입은 남자들의 환영도 보인다. 계속 욱신거리는 꿈을 기록영화로 남기고자 친구 '인선'과 의기투합해보지만 좀처럼 때가 맞지 않는다. 교류도 점차 뜸해진다.

4년이 지난 겨울 인선의 갑작스러운 연락으로 꿈은 다시금 선명해진다. 목공 일을 하다 두 손가락을 잘린 인선은 자기 상처보다도 제주 집에 홀로 남긴 앵무새 '아마'를 더 걱정한다. 아마를 구해주고 돌봐달라는 부탁에 경하는 폭설과 강풍에 맞서 제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70여년 전 온 가족을 잃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빨갱이로 몰려 15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인선의 아버지, 그리고 부모와 동생을 한날한시에 잃었지만 행방이 묘연한 오빠만큼은 살아있을 줄로 믿으며 찾아다녔던 인선의 어머니 '정심', 그리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를 기록해 온 인선의 역사를 마주한다. 인선에 대한 회고와, 인선의 환영을 통해서다.

현실-환상의 이중 구조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며 행하는 폭력과, 그럼에도 사람과 삶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놓지 않는 인간의 고투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한강은 "사랑은 내 삶과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동시에 살게 한다"며 "두 세계를 살아가는 건 사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늘 경험하는 일"이라고 했다. 사랑은 한강 자신도 살렸다. 그는 "'작별하지 않는다'는 언제나 내게 지극한 사랑의 상태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소년이 온다'를 쓰고 나서 계속 악몽을 꿨어요. 죽음이 깊이 제 안으로 들어오는 경험이었죠. 그런데 이 작품을 쓰면서는 그 죽음에서 벗어나 삶으로 건너올 수 있었습니다."

소설은 제주와 꼭 닮은꼴이다. 수만 명이 희생된 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의구히 아름답고 찬란해 더욱 슬픈 것처럼, 한강의 시리도록 미려한 필치 속에 역사적 비극은 더욱 선연해진다. "처음에는 새들이라고 생각했다. 흰 깃털을 가진 수만 마리 새들이 수평선에 바싹 붙어 날고 있다고. 하지만 새가 아니다. 먼바다 위의 눈구름을 강풍이 잠시 흩어놓은 것이다. 그 사이로 떨어진 햇빛에 눈송이들이 빛나는 것이다. 해수면이 반사한 빛이 거기 곱절로 더해져, 흰 새들의 길고 찬란한 띠가 바다 위로 쓸려 다니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거다."

작품은 원래 단편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작별'에 이은 한강의 눈(雪) 3부작의 마지막 순서로 기획됐다. 분량이 길어져 별도 장편으로 독립했지만 여전히 눈은 주요 소재다. "눈이 생명과 죽음 사이에, 빛과 어둠 사이에, 영원처럼 느리게, 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신의 공백 위로, 인간의 유한성을 환기시키면서 있다"고 한강은 말한다. 그 중에서도 눈은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가장 선명하게 그어준다. 산 사람은 따뜻한 얼굴을 가졌으므로 그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은 녹지만, 망자의 몸은 차가워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끼는 대비가 독자에게 깊게 가닿는다.

경하와 인선, 그리고 정심까지. 주인공들은 모두 통증을 갖고 있다. 경하는 위경련과 혈압 강하를 동반하는 오랜 편두통으로 약과 껌을 달고 다니며, 인선은 소독을 위해 3분에 한 번씩 봉합부위를 바늘로 찔리며 괴로워한다. 정심은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항상 전기요 밑에 실톱을 깔고 자지만 별무소용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통증은 죽은 자를 기억하고, 투쟁하는 것을 가능케하는 생존자들의 특권인 터다. 제목 '작별하지 않겠다'도 애도와 사랑을 끝내지 않고 모든 것을 끝까지 끌어안고 가겠다는 의미다. 작가는 "고통이 따르지만 그것이 죽음 대신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며 인선의 입을 빌린다.

"봉합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중략) 지금은 물론 손가락을 지키는 편의 통증이 강하지만, 손가락을 포기할 경우 통증은 손쓸 수 없이 평생 계속될 거라고."(40~42쪽)

한강은 장편 '채식주의자' 영역본으로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당시 맨부커 국제상)을 받았다. 부커상은 노벨문학상, 공쿠르상 등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2016년 '흰' 이후 5년 만의 신작 장편이다.

[서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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