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불나방과 불사신

2021. 9. 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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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정남구 대구소방안전본부장(소방준감)


팔구월 이맘때면 가로등 아래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있는 불나방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놈들은 불빛을 좋아하는 습성 탓에 결국 자신조차 불타는 것을 알지 못하고 현혹된 것이다. 인간 사회에도 불만 보면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119소방관이라 부른다. 불을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불길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이 불나방과 다른 점이다.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치거나 죽지 않는 사람을 불사신(不死身)이라 칭한다. 그 대표적 아이콘으로 슈퍼맨을 떠올린다. 그리고 119소방관이 항상 우리를 지켜주는 슈퍼맨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에는 슈퍼맨이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 10년 동안 각종 사고 현장활동 중 119소방관 49명이 순직했고 3614명이나 다쳤다. 무려 열 명 가운데 한 명꼴에 가깝다. 그 아픔과 상처는 당사자에게만 그치지 않고 사고현장을 함께 한 동료대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마치 본인이 사고를 당한 것처럼 기억공간에 저장되어 평생 가위눌림과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이 같은 사슬의 기저에는 ‘인명구조 최우선 원칙’이라는 뿌리 깊은 신념이 한몫하고 있다. 너무나 소중한 가치이기에 반론이나 판단의 여지가 없는 정언명령(定言命令)이다. 현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소방관에게 물으면 백이면 백 모두가 서슴없이 인명구조라고 답한다.

하지만 맹목적 원칙 준수의 대가는 흡사 가로등의 불나방처럼 가혹하다. 구조대상자 수색에만 사로잡혀 현장의 위험요소들을 간과하고 낙상이나 고립에 노출되어 안전사고로 이어진다. 또 전체 상황을 살펴볼 여유가 없어 소방작전을 퇴색시키고, 소수인원 구조하기에 전념하다 다수인을 구할 기회를 잃기도 한다. 2·18대구지하철화재에서 대합실 사람들 구하다가 객차에 갇힌 사람들이 희생됐고, 세월호사고에서 갑판 위 사람들 구하다가 선실에 갇힌 사람들의 구조 기회를 놓쳤다.

바둑에서도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라고 했다. 이제 소방관들이 불빛에 현혹되지 않고 현장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옥죄고 있는 굴레를 벗겨 줄 때다. 우리의 더 나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소방관들이 좀 더 안전하게 현장활동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119소방관의 제1원칙으로 ‘현장확인 최우선 원칙’은 어떨까. 지구를 구하는 영웅 슈퍼맨이 아니라 주어진 임무를 무덤덤하게 완수하는 작은 불사신 119소방관을 기대해 본다.

정남구 대구소방안전본부장(소방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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