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이제는 더이상 외로워하지마세요

한겨레 2021. 9. 7.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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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김형태변호사의 공동선]

사진 픽사베이

박정월 여사가 돌아가셨습니다 . 박정월이 누구야 ? 여사라고 ? 할머니는 아흔 넷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제 속으로 낳은 자식도 없고 왕래하는 친지도 없이 홀로 사시다가 요양보호사 아주머니에 의해 그 마지막이 발견되었습니다 .‘ 정원에 뜬 달 ’ 이란 아름다운 뜻을 가진 그 이름을 아는 이는 이 세상에 몇이 안됩니다 . 그리고 ‘ 여사 ’ 하면 영부인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지만 그래도 나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할머니 이름을 부르고 , 여사라는 호칭을 붙여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합니다 .

몇 년전 온 천지가 타들어 가듯 뜨겁던 어느 여름날 할머니를 병원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 구순의 할머니는 다리를 다쳐 병원에 누워 계셨는데 너무도 정정하셨습니다 . 할머니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이지만 평화와 통일을 위해 잘 써달라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 당신은 처녀시절 미혼인줄 알고 결혼했던 남편이 전처 소생 자식을 셋이나 데리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 그래도 그 애들을 위해 제 자식 안 낳고 잘 키웠습니다 . 사업 수완이 있어 가족 생계를 책임졌고 전처 자식들 시집 장가 보낼 때 먹고 살 밑천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

그런데 그들은 할머니 잘 모실 생각은 않고 재산에 관심을 가지다가 급기야 얼마 전에는 막말까지 해대고 결국 민형사 소송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 할머니는 형제들이 이북에 있어 아주 오래전 북에 가려다 붙잡혀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살이를 한 적이 있고 , 그 뒤 북에 있는 조카들과 연락이 닿아 제법 큰 돈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 그런데 전처 자식들은 이런 왕래편지를 빌미로 할머니를 국가보안법으로 고발하겠다는 으름짱을 놓기도 했습니다 . 이제 마지막 길에 , 찾아와 엎드려 절할 이가 없어 빈소도 차리지 못한 터에 왕래가 별로 없던 조카들과 전처 자식들의 연고권 문제로 장례도 제때 못치르고 할머니는 차가운 냉동고 속에 속절없이 누워 있습니다 .

참 ,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

저 냉동고 속 할머니 처녀시절 왜 속아서 결혼을 하게 내버려 두셨나요 . 마음 넓은 총각 만나 토끼 같은 새끼들 낳아 증손주들 재롱 보다가 눈감도록 해 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 아니 , 그런 호사는 못 누리더라도 그저 전처자식들이며 조카들이라도 마지막 가는 길에 달려와 엎드려 절하고 눈물로 보내드리게 하실 수는 없는 건가요 . 할머니 유지를 받들어 뒷일을 수습해야 할 나로서는 참으로 원망스러웠습니다 . 잠이 안와 뒤척이다 곰곰 생각해보니 어디 저 할머니 일 뿐 아니라 세상사 모두가 그렇더군요 . 착한 이가 잘 되고 나쁜 놈이 망하고 일이 순리대로 풀리는 경우가 어디 흔하던가요 .

예수님 일만 해도 그렇지요 .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분이 왜 거지처럼 마굿간에서 태어나 병든 자 , 어부 , 세리 , 가난한 이들 같은 밑바닥 인생들과 어울려 다니시다 제자에게 배신당하고 강도 옆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건가요 .

아니 , 예수님 스스로 가난한 이가 복이 있다고 , 슬퍼하는 이가 복이 있다고 ,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이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할머니의 박복한 삶을 이유로 하느님을 원망할 일이 아니라는 깨우침이 새삼 들었습니다 .

아니 , 이 흠 투성이 ‘ 나 ’ 밖에 어디 저 멀리 하늘나라에 하느님이 따로 계셔서 나의 운명이며 세상만사를 좌지우지하시는 게 아니라 , 이 흠 투성이 ‘ 나 ’ 가 바로 하느님의 모상 (Imago Dei) 이며 , 이 흠 투성이 ‘ 나 ’ 야말로 당신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당신 뜻을 이 세상에 펴나가는 거란 깨달음이 새삼 다가왔습니다 .

그렇습니다 . 비록 장례도 제대로 못치르고 빈소도 없이 냉동고 속에 누워 계신 ‘ 박복한 ’ 할머니지만 평화를 위해 가진 걸 모두 내어놓으신 저 할머니는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박복한 게 아니라 ‘ 하느님의 자녀 ’ 라 불릴 것입니다 .

평생 통일운동을 하다가 ‘ 빨갱이 ’ 로 감옥을 들락거린 팔순 , 구순 노인들에게 할머니 부음을 전했더니 발인날에 오겠다고들 하시더군요 . 그리고 화장한 유골은 먼저 가신 ‘ 빨갱이 ’ 할아버지들이 있는 북한산 자락 어느 절에 같이 모시로 했습니다 .

평생 외로우셨던 할머니도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으시겠죠 ?

글 김형태 변호사/공동선 편집인

***이 시리즈는 김형태 변호사가 발간하는 격월간 <공동선>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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