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수의 농구人터뷰②] 'KBL 첫 드래프트 2순위' 윤영필 "언더사이즈 빅맨.. 정말 힘들었습니다"

점프볼 2021. 9. 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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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2009년까지 프로 무대에서 뛰었던 윤영필(46‧192㎝)은 시대를 잘못 만난 언더사이즈 빅맨 중 한명으로 꼽힌다. 빅맨으로서 190㎝ 초반대 신장은 당시로서도 작은 사이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영필은 경희대 시절부터 대학 최고 파워 포워드로 꼽혔다. 뛰어난 탄력과 넘치는 투쟁심, 거기에 왕성한 활동량을 앞세워 골밑을 마치 파이터처럼 누볐다.

 

그 결과 유명세와는 별개로 프로구단 사이에서 일찌감치 알짜 선수로 평가받았고 1998년 KBL 첫 드래프트에서 현주엽에 이어 전체 2순위로 안양 SBS 스타즈(현 안양KGC)의 지명을 받는다. 김택훈, 이은호, 신기성, 변청운 등 쟁쟁한 선수들이 남아있었다는 점에서 윤영필에 대한 기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만하다.

 

실제로 윤영필은 2순위로 지명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선수였다. 출장 시간에 관계 없이 코트에 나서게 되면 늘 최선을 다했고, 궂은일 등 살림꾼 역할에 능했다. 이른바 감독이 좋아할만한 선수였다는 평가다.

 

그렇다고 이른바 ‘소리 없는 빅맨’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1998-1999 정규리그에서는 40경기에 나서 8번의 덩크슛을 모두 림에 꽂아 100% 성공률로 ‘토종 최고 덩크맨'으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덩크슛 시도 자체가 많지 않던 시절임을 감안 했을 때 누구보다도 화끈한 플레이를 펼치던 유형의 선수였다.

 

아쉽게도 프로 생활 동안 윤영필은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했다. 그가 뛰었던 당시는 외국인 선수 2인제가 실시되고 있었고, 주로 포스트형 빅맨이 대세였다. 기량과 관계없이 출장시간에서 많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1인제 외인 체제에서 빅맨도 적극적으로 외곽슛을 쏘는 시대에서 뛰었다면 많은 면에서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안녕하세요.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근황을 궁금해하시는 농구팬들도 많습니다.

- 안녕하세요. 은퇴하고 벌써 10년이 넘었고, 현역 시절에도 쇼맨십이 넘치거나 끼가 많은 스타일이 아니었음해도 이렇게 기억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현재 수원의 한 중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날 운동을 하면서 힘든 기억이 많아서 오랜 시간 운동에 등을 돌리고 지냈더니 살이 많이 불어버렸습니다.(웃음)

 

무서운? 혹은 친구 같은? 교사로서 윤영필은 어떤 스타일인지요? 더불어 개인적인 교육관 등이 궁금합니다.

- 일단 키가 크고 덩치가 있으니 학생들이 무서워하는 것 같기는 해요. 뭐, 그렇다고 수업이나 생활지도를 무섭게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 친구 같은 스타일로 대하면 아이들이 친구로 알아서 안 되고요…. 이런 부분은 여전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의 교사관은 ‘규칙과 원칙을 지키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자’와 ‘한 사람의 몫을 하자’입니다. ‘한 사람의 몫을 하자’는 말은 자신의 위치에서 주어진 일을 마무리 하자라는 뜻입니다.

 

은퇴 후 행보에 대해 자세한 말씀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 비교적 큰 변화 없이 단순하게 지냈던 것 같아요. 선수를 은퇴하고 바로 중학교에서 농구 코치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선배가 있어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학생의 인생을 책임지는 자리라 부담도 되고 조금 힘들었습니다. 부장님과도 서로간 스타일이 잘 맞지 않아 고민하던 중 수원의 모 중학교에 기간제 자리가 있다고 하여 지금까지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농구를 가르치는 쪽이 아닌 일반적인 체육 교사입니다. 담임도 맡고 있구요.

 

 

동시대에 뛴 선수 중 상당수가 프로 무대에서 지도자 혹은 해설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해당 분야에는 관심이 없으신가요?

- 음,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관심이야 있습니다. 간혹 예전에 고생하면서 배운 경험이나 느낌, 생각 등을 후배들에게 어떤 식으로도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들고는 합니다. 화려함은 덜했을지 몰라도 궂은일 위주로 외국인 선수와 몸싸움하면서 익힌 여러 가지 노하우 등은 분명 흔치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만약에 그럴 기회가 주어진다면 열심히 배워서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에이스는 아니었지만 늘 꾸준했던 학창시절

 

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 저와 비슷한 시절에 농구 하셨던 분들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계기가 비슷비슷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기말고사가 끝나고 겨울 방학 전 쯤입니다. 하교 후 친구와 집에 가려고 하는데, 친구가 서무실(지금의 행정실)에 들렸다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때는 중, 고등학교 서무실이 본관에 위치했고 교장실이 그 안쪽에 있었습니다. 친구가 일을 보고 저는 벽에 붙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교장실 문이 열리더니 선생님 한 분이 나오셨어요. 인사를 했더니 받으시면서 저를 위 아래로 쭉 보시더니 ‘몇 학년이냐?’, ‘키가 몇이냐?’ 등을 물어보시더라구요. ‘선생님과 이야기 좀 하자’고 하셔서 친구는 먼저 가고 전 남아서 상담 후 집에 갔습니다. 다음날 어머님이 학교에 오셔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셨고 그 다음 날부터 농구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에게 선택사항은 없었네요.(웃음) 

 

처음부터 쭉 빅맨 포지션을 맡으셨나요?

- 다소 늦은 나이인 중학교 끝자락에 운동을 처음 시작했던지라 포지션이고 뭐고 딱히 없었습니다. 볼 트래핑과 체력 훈련이 주였습니다. 그러다 점차 드리블, 골밑슛, 수비 등을 연습하니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더군요.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연습을 하는데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골 밑에서 하는 것들뿐이고 동기들 중에서도 (현)주엽이 다음으로 컸던지라 센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대학교에 진학해서 감독님에게 외곽 공격하는 방법을 배워나가면서 파워포워드 포지션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휘문중, 휘문고등학교를 나오셨어요. 서장훈, 현주엽 등 거물급으로 평가받던 선수들과 함께 했는데요. 이름값 높았던 전국구 스타들과 같이 플레이하면서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을 말씀해주세요.

- 워낙 대단했던 선수들인지라 그들과 함께하면 전력도 강했고, 뛰어난 기술을 옆에서 보고 배울 수 있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아쉬운 것이라면 팀 플레이가 조금 단조로웠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에이스가 있는 팀들의 공통된 장단점이 아닐까 싶어요. 그 정도 선수들이 있다면 감수해야 될 부분이었겠죠. 

 

학창 시절 농구를 하면서 서장훈, 현주엽 등 많이 알려진 선수 외에 ’아! 저 선수는 정말 잘했다‘고 기억나는 선수가 있으신가요?

- 글쎄요. 제가 워낙 운동을 늦게 시작했고, 당장 처한 상황에서 할 것 외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서요. 워낙 기본기가 떨어지고 경험이 부족했던지라 개인적인 발전을 이루기도 바빴습니다. 다른 팀과의 교류도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아! 부산 동아고의 김수환이 생각납니다. 제 기억 속에서 플레이가 참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학창시절 윤영필의 플레이 스타일은 어땠나요?

- 지금 생각해봐도 고등학교 시절에는 기술 자체가 거의 없었습니다. 믿는 것은 오직 힘과 점프뿐이었죠. 골밑에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힘으로는 안 질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학에서 기술의 차이를 느끼고 높은 벽에 부딪히는 듯한 느낌을 자주 받았습니다. 대학농구에서는 힘은 30%, 기술이 50%, 경험이 20% 정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기술을 만드는데 2년 이상 걸린 것 같습니다. 그때 슬럼프도 찾아오고… 1, 2학년 때는 정말 많이 힘들었습니다. 3학년 때부터 조금씩 골 밑에서 벗어나 프리드로우 라인까지 올라가 플레이를 하기 시작하면서 농구의 새로운 맛에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충분히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등에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당시 중위권이었던 경희대를 선택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요?

- 가족의 영향이 컸습니다. 삼촌이 농구선수 출신이라 많은 도움을 주셨고, 부모님도 경희대를 원하셨습니다. 저도 반반이었지만, 선수를 잘 키워주신다는 고등학교 코치 선생님 말씀에 따라 경희대로 진학을 하게 됐습니다.

 

윤영필에게 ’언더사이즈 빅맨‘이란?

- ’정말 힘들다’입니다. 힘과 점프로 커버를 한다고해도 안되는 것이 있더라고요. 특히 외국인 선수들과 경기할 때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190㎝가 넘는 키를 가지고 ’신장이 아쉽다‘고 말하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농구선수였고, 포지션도 빅맨 쪽이었기 때문에 ’좀 더 컸으면…‘할 때가 많았습니다. 센터를 하기에는 너무 작고 파워 포워드를 하기에도 큰 키는 아니었고 거기에 기술까지 부족했던지라, 키라도 더 컸으면 많은 면에서 좋았겠죠.

 

1998년 KBL 첫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에 뽑히셨어요. 1순위 현주엽을 제외하고도 기라성같은 선수들이 즐비했는데요. 본인의 개인적인 기대치는 어느 정도였나요?

- 드래프트라는 것이 처음이었고 낯설고 모르는 것 투성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좋은 순위로 뽑혔지만 당시에는 저와 비슷한 입장에서 생각하는 선수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솔직히 큰 기대감은 없었습니다. 그저 1라운드에 뽑히면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저를 선택해준 SBS에 감사했습니다.

 

외인 2인제로 인한 출장시간의 어려움은 이미 예상하셨을 것 같아요. 언더사이즈빅맨으로 프로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부분에 신경을 썼는지 궁금합니다. 더불어 덩크슛을 잘하셨어요. 당시 덩크슛이 흔한 시절도 아니었는데 1년 후배 김성철과 함께 경쟁적으로 덩크슛을 시도하던 기억이 납니다.

- 단순히 골밑에서만 플레이해서는 경쟁력이 떨어지겠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외곽도 겸비한 플레이 스타일을 갖추려 노력을 했습니다. 파워 포워드는 물론 스몰 포워드까지 소화하려고 했는데 포스트 플레이가 몸에 배였던지라 변화 자체가 쉽지 않았습니다. 3점 슛과 드라이브 인 연습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음, 덩크슛같은 경우는 경쟁적인 정도까지는 아니고 기회가 나면 망설이지 않고 시도하려는 생각은 했습니다. 속공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다보니 찬스가 많이 났습니다.

 

만약 현시대에서 뛰었다면 커리어, 플레이 스타일 등에서 변화가 있었겠죠?

- 그랬을 것 같습니다. 지금 농구 경기를 보면서 자랐다면 스타일에 변화가 있었겠죠, 전 농구대잔치를 보고 자라서인지 당시에 많이 쓰이던 형태의 농구를 했습니다. 만약 지금이라면…, 외국인 선수가 1명만 뛰니 골밑에서 플레이 할일이 더 많아질 것 같습니다. 덩크도 좀 더 적극적으로 시도 하고요.

 

함께 뛰었던 외국인 선수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을까요?

- 주니어 버로가 많이 생각이 납니다. 경기 컨트롤과 감정조절, 그리고 골 밑에서의 다양한 플레이에 대해 영향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가르쳐줬다기보다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을 보고 따라 하려고 많이 노력했죠. 물론 따라하고 싶어도 제대로 안되는 것 투성이였지만요. 여러 면에서 배울 점이 많은 선수였어요.

 

경희대 시절, SBS 시절, 정말 잘해주었고 팀도 성적이 나쁘지 않았지만 아쉽게도 우승하고는 인연을 맺지 못하셨어요.

- 그러게요. 성인 농구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우승과 인연이 계속 어긋났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항상 2인자의 자리에 있었지요. 그렇지만 2위까지 갈 수 있도록 함께해준 동료들과 뛴 그 시간들은 참 좋았습니다. 지난 일에는 늘 좋은 추억과 더불어 아쉬움도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다시 태어나도 농구선수를 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만약 그렇다면 이번에도 포지션은 빅맨쪽일까요?

- 반반입니다. 우선 운동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할 것 같고, 농구와 야구 중에서 또 고민할 것 같아요. 만약 농구의 길로 들어선다면 이번에는 가드를 선택할 겁니다. 전체적인 게임조율을 한번 해보고 싶어서요. 선수 생활 내내 골밑에서 주로 싸워봤으니 다른 것도 해봐야 하지 않겠어요.(웃음)

 

마지막으로 선수 윤영필을 여전히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팬 분들께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 아직까지 잊지 않고 기억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언제 어디서 인사를 드리게 될지 모르겠지만 저도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겠습니다. 만약 기회가 닿아 농구코트에서 인사드릴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19시기에 여러모로 많이들 힘드시겠지만 조금 더 기운내시면 곧 좋은 날이 돌아올 것이다고 믿어봅니다.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사진 | 본인 제공

 

◇ 필자는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농구를 사랑하던 오랜 팬으로 2002-2003년 본지에 농구 무협소설 '해동전설(海東傳說)''을 연재한 바 있으며 데일리안, 홀로스, 오마이뉴스 등 다양한 인터넷 매체에서 스포츠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김종수의 농구人터뷰>를 통해 전현직 농구인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시각으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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