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가짜뉴스보다 더 두려운 것

- 2021. 9. 6.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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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재가공해 만드는 '탈진실'
권력과 합세해 유포 땐 큰 위험
사실과 거짓 이분법으로 구분 못해
언론중재법 통과 땐 감시 힘들어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탈진실은 작동한다. 글쓰는 이, 말하는 이는 탈진실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탈진실은 거짓과 동의어가 아니다. 탈진실은 진실을 가공한 담론이다. 진실과 탈진실은 구분하기 어렵다. 탈진실은 가짜뉴스도 아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이지만, 탈진실을 구성하는 자는 자신이 거짓을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또 다른 진실, 숨겨진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그 은폐된 진실을 자신이 비로소 드러낸다는 환상을 갖는다. 탈진실은 리플리 증후군(현실을 부정하면서 자신이 만든 허구를 진실이라고 믿음)과 연동한다.

탈진실이 이토록 정교한데 법이 어떤 기능을 할 수 있을까.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이 세계의 담론을 ‘사실’과 ‘거짓’으로만 이분하는 듯하다. 탈진실은 이 이분법에 걸려들지 않는다. 순진한 발상의 언론개혁은 도리어 탈진실의 온상이 될 것이다. 이분법의 칼날로 베어낼 수 있는 탈진실은 없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 작가
영화 ‘논-픽션’에는 탈진실에 대한 대화가 오간다. “오래전부터 탈진실의 시대야”, “각자의 선입관이 정해준 허구 세계에 사는 거지”, “불확실한 세계에서는 모두 확신을 원하니까”, “오히려 아주 선명하게 X선 사진을 찍는 것 같아”, “이 선명함은 아무 쓸모가 없어”.

자기 몸을 알기 위해 X선 사진을 찍는다 해서, 그 사진이 내 몸은 아니다. 이 투과력이 강한 복사선이 몸속을 빠르고 정확하게 훑어냈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몸을 온전히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X선은 신속정확하지만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X선 사진만 찍어대는 언론을 원하는 것일까.

“한 번의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이지만, 천 번을 반복한 거짓말은 진실이 된다.” 나치의 선전 총책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말이다. 권력자가 만들어낸 탈진실은 진실의 외양을 하고 있다. 이 탈진실은 가짜뉴스보다 훨씬 위험하다. 가짜는 ‘가짜’라고 비판하면 되지만, 탈진실은 그것이 허구임이 드러나는 순간 또 다른 탈진실로 덮인다. 탈진실이 반복되고 그 연쇄가 길어지면 그것은 더욱 진실처럼 작동한다.

페북, 트위터, 유튜브 등 이런 뉴미디어는 탈진실을 공정하는 플랫폼이다. 이 플랫폼에 권력이 침투하면 탈진실은 진실의 표정을 하고 사람 앞에 나타난다. 우리 시대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권력자가 진실을 재가공해 만든 탈진실이다. 많은 추종자를 둔 권력자의 탈진실은 매력적인 서사로 둔갑하기도 하고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희생양 스토리로 탈바꿈되기도 한다. 희생양 탈진실 서사는 그 서사를 발생시킨 사람이 스스로 피해자 정체성을 갖기 때문에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추종자는 더 많아지고 연민의 정서는 그 연대를 더 강력하게 만든다. 추종자는 앞다투어 그 피해자 정체성을 내사하고 이 세계를 ‘우리’와 ‘적’으로 구분해 비판을 실종시키고 진실을 무효화시킨다.

‘불편한 진실’을 파묻는 것도 탈진실이다. 마치 범죄추리물 같은 탈진실의 서사는 불편한 진실을 품고 있는 사람을 죄없는 죄인으로 낙인찍는다. 대중은 그에게 돌을 던지고, 결국 법적인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그는 추방당한다. 그의 무죄가 증명돼도 더 이상 흥미를 끌 수 없는 그 서사는 이미 종결된 뒤다.

권력과 합세해 탈진실이 유포될 때, 그것을 누가 막아낼 수 있을까. 언론, 레거시 미디어(전통매체)다. 그러나 언론중재법이 통과되면 그것마저 불가능해질 것이다. 외부검열과 징벌체계는 언론인이 탈진실에 근접조차 못 하게 할 것이다. 권력과 야합한 탈진실에 가까이 가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탈진실은 더 조직화되고, 언론인은 손발이 묶이고, 지식인은 침묵하고, 국민은 방관하고, 이 세상은 탈진실과 리플리로 넘쳐날 것이다. 지금까지 언론의 자유는 외부의 힘이 아니라 윤리적 자기검열로 가능한 것이었다. 언론중재법이 통과되면 언론인의 윤리적 자기검열은 고사될 것이다.

‘논-픽션’에서 이 세계를 탈진실의 시대라고 말한 남자, 그에게는 어떤 진실이 있었을까. 그는 다른 여자와 불륜 관계에 있었다. 아내에게 소홀하지는 않았다. 이혼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교묘히 탈진실로 진실을 위장해 왔던 것이다. 예리하고 윤리적인 아내, 남편의 위장을 밝혀낸다. 남편과 헤어지지는 않는다. 자신의 진실 또한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묻는다. “나, 사랑해?” 남편은 “응” 대답하지만, 1.5초 지난 뒤다. 그 1.5초에 미안함과 자책감, 두려움, 아내에 대한 사랑이 들어 있을 것이다. 아내는 남편의 진실을 읽어내듯 말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둘은 서로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 합의하고 서로의 어깨에 기댄다.

영화의 마지막, 놀랄 만한 진실이 드러난다. 강변에 나란히 앉아 아내가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그동안 숨겨 왔던 게 있어.” 남편은 묻는다. “남자 생겼어?” 아내의 어조는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임신했어.” 남자는 요즘 자기들 성생활이 활발하지는 않았다고 뭉그적거린다. 이때 아내가 말한다. “단 한 번만으로도 가능해.” 이젠 둘 다 행복하다는 데 합의한다. 둘은 겹겹의 탈진실을 뚫고 진실에 당도했다. 사실의 조합만으로 진실에 도달할 수는 없다.

탈진실의 시대, 거짓말쟁이는 당연히 살아남지 못한다. 대신 리플리는 더 진화한다. 개정언론중재법은 리플리를 색출하는 것이 아니라 더 교묘하고 매력적인 리플리를 양산할 것이다. 레거시 미디어는 무력해질 것이고, 뉴미디어는 타락해 갈 것이다. 언론중재법, 진실의 언론이 아니라 탈진실의 권력을 옹호할까 두렵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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