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작동하는 지침에 대한 예리한 질문, 연극 '보도지침'
11월14일까지 대학로서..4연에도 여전한 인기
“‘국회의원 김대중 얼굴을 1면에 싣지 말 것.’ 김대중 얼굴이 국가기밀이었습니까?” 변호사는 법정에서 검사에게 이렇게 질의한다. 2016년 초연 이후 올해 네번째 막을 올린 연극 <보도지침>의 한 장면이다.
연극은 전두환 군사정권이 기사 작성부터 편집 방향까지 지시하며 언론을 통제한 ‘보도지침 사건’을 다룬다.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는 시사 월간지 <말>에 보도지침을 전달했고, <말>은 1986년 9월 ‘보도지침―권력과 언론의 음모’라는 특집 기사로 보도지침 584건을 폭로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보도지침 탓에 다른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 및 국가모독죄로 구속된 김주언 기자는 9년 만에야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연극은 이 보도지침 폭로 사건의 판결 과정을 법정 드라마로 재구성했다. 김주언 기자는 김주혁 기자로, <말>은 월간 <독백>으로 각색됐다. 이와 함께 <독백> 발행인 김정배, 변호사 황승욱, 검사 최돈결이 나온다. 이들 모두가 대학 시절 연극반 신입생 동기였다는 설정으로 무대는 현재의 법정과 과거의 동아리방을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한때 친구였던 검사와 변호사는 ‘보도협조사항’인지 ‘보도지침’인지를 놓고 다툰다.
돈결은 연극반 시절, 동독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금서가 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애>를 무대에 올리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금서를 연극으로 올리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온다. 신입생들은 지침을 거부하고 브레히트 연극을 무대에 올리지만,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부잣집 아들인 돈결은 고문 대신 회유를 받으면서, 이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보도지침>에는 ‘독백’이라는 대사가 자주 등장한다. 연극을 관통하는 열쇳말이다. 신입생들은 연극을 시작하면서 “진실을 담은 말은 힘이 있다. 가장 진실한 말, 마음의 소리를 독백이라 부른다”고 배운다. 이 대사는 법정에서 “진실한 보도는 힘이 있다”로 자연스럽게 전환된다.
‘침묵’ 역시 자주 나오는 대사다. 연극동아리 술자리에서 동아리 출신 교수가 흘러가는 농담처럼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반백년을 살면서 배운 진리가 하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
논리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쓴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문장으로 유명한 이 대사는, 연극에서 다른 의미로 제시된다. 언론이 진실을 외면하고 보도하지 않은 채 침묵한다는 얘기다. 이 침묵은 연극에 나오는 또 다른 대사인 “당연하지 않은 걸 당연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언론과 표현의 자유다”와 충돌한다.
주혁은 이런 대사를 한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년 5월20일, 광주 시민을 무차별 학살한 현장을 보도하지 못했다며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이 함께 쓴 공동사직서 내용이다.
연극은 다소 무거운 소재인데도 참신한 설정과 탄탄한 대본으로 의미와 재미를 함께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설정을 속도감 있게 펼치며 ‘촌철살인’의 대사를 이어간다.
전두환 정권 당시 언론탄압을 다룬 <보도지침>이 지금도 여전히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의 보도지침은 6월항쟁 뒤 언론기본법이 폐지되면서 공식적으로는 사라졌다. 이후 30여년의 시간이 흘렀고 정권은 여러차례 바뀌었다. 하지만 우리를 움직이게 하거나 혹은 멈추게 하는 ‘지침’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연극을 보면서 누군가는 언론·시민단체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의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떠올릴 법하다. 다른 누군가는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 기자 대량 해고 등 권력의 언론장악 사태를 떠올릴 것이다. 광고주의 압력처럼 자본의 요청에 따른 지침도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연극은 지금도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는 지침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지난달 31일 막을 올린 <보도지침>은 11월14일까지 서울 대학로 티오엠(TOM) 2관에서 공연한다. 지난 3일 찾은 공연장은 거의 만석에 가까웠을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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