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중미술 연구한 일본인 후루카와..남성 중심 운동 속 가려진 페미니스트 여성 미술가도 조명
[경향신문]
후루카와 미카가 지난달 12일 김복진상을 받았을 때 작가 성효숙은 페이스북에 축하 인사를 보내며 “그녀는 번듯한 전시장의 미술보다 저항의 현장미술을 찾았으며 그래서 후미진 곳에서 작업하는 나 같은 사람도 찾아내어 일본의 진보 여성지에 실어주기도 했다”고 썼다. 성효숙은 한진중공업·콜트콜텍 등 노동운동 현장에서 미술작업을 해왔다. 2012년 부산비엔날레에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200명의 작업화로 만든 ‘진혼’을 출품했다.
후루카와는 현장을 찾아다닌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무엇에 저항하고 무엇을 꿈꾸었는가, 그들이 시대의 고통을 느끼며 그려 새긴 표현을 목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술을 통한 ‘사람의 이야기’를 적어둬야 한다. 민주화운동, 노동운동과 연대한 수많은 무명 집단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20여년 한국 현장 취재의 결과물이 2018년 출간한 <한국의 민중미술 - 저항의 미학과 사상>이다. 김복진상운영위원회는 후루카와의 수상(재일조선인 연구자 백름과 공동수상)을 발표하면서 “일본의 대표적 출판사인 이와나미서점에서 출간한 그의 노작 <한국의 민중미술 - 저항의 미학과 사상>의 중요성을 주목했음을 밝혀둔다. 이 저서는 문헌 연구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민중미술가들과 교류하며 체득한 정보와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것이다. 한국 민중미술을 바라보는 저자의 독자적인 시선과 관점을 드러낸다”고 했다. 후루카와도 “한국분들과의 공동작업이다. 한·일을 왕복한 발자국이 인정돼 정말로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위원회는 서구 근대조각을 한국에 이식·정착시켰고,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토월회·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를 주도한 김복진을 기리려 2006년부터 매년 언론인·비평가를 뽑아 상을 주고 있다.
외국인이 왜 한국 민중미술을 파고들었는지 궁금했다. 후루카와는 일본에서 위안부 사죄·보상 요구와 재일동포 고등학교 무상화 요구 시위 등에 참여했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집회 때 한국에 와 촛불을 들었다. 연대 활동의 이유도 알고 싶었다. 수상 이후 후루카와와 e메일 인터뷰를 한국어로 진행했다.
후루카와는 한국과의 인연을 두고 “우연한 만남의 연속이다. 그 우연이 겹쳐 어느새 내 인생의 필연이 됐다”고 했다. 1986년 차문화 교류 행사에 참석하러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어머니가 일본의 전통 다도 유파 중 하나인 전차도의 당주였다. 그때 경주를 찾았다. “불상, 고분, 유물의 아름다움에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한반도의 고대미술, 차문화, 불교, 음양오행 사상, 샤머니즘을 두고 생긴 관심은 곧 한국 현대미술로 향했다”고 말했다. 이웃 나라에 깊이 있는 고대 예술이 존재했고, 일본이 한반도에서 많은 문화를 배웠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고 했다. 한국 현대미술도 격조 높다고 여겼다. “그 매력이 일본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일본에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술수첩’ ‘세계’ 같은 일본 잡지에 한국 미술을 소개했다.
1990년대 초반 주한 일본대사관의 전문조사원으로 일했다. 한국 현대미술을 조사·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때 민중미술을 접하고선 ‘왜 이런 미술이 태어난 것일까’ 고민했다. 그 고민은 과거 식민지 역사, 그 후 지속된 식민주의로 이어졌고, ‘예술은 무엇인가’란 근원적 질문에도 맞닿았다. “‘자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중심적인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해온 근대 이후 서구 중심의 가치관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과 사회·정치·예술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는 작업을 하려 했다. 당연히, 인권에 관련된 일이다.” 그는 “과거 역사를 지워 없애려는 일본인의 왜곡된 조선관에 뚜껑을 닫은 채 아름다움을 내세운 미술에 관한 연구만 할 수 있느냐는 문제의식도 생겼다”고 했다.
후루카와는 여러 연구와 전시기획 활동 중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 ‘예술과 인권’ 전시에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참여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많은 민중미술 작가들과 만나 광주민중항쟁을 비롯해 한국 근현대 시기 여러 학살의 역사를 직접 듣고 배웠다. 저항의 역사에서 인권이 짓밟히면서도 끝내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2002년 제4회 광주비엔날레에서는 홍보대사로도 활동했다. 2013년 ‘사람과 사람을 부른다 - 홍성담 광주 오월 판화 - 새벽’전 등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전시를 여러 차례 일본에서 열었다.
후루카와는 “한국의 민주화는 철학이자 미학이며, 역동적인 사상의 리듬”이라고 말한다. 민중미술을 두고 “민중미술운동에 일관되게 흐르던 것은 고매한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다. 이것이 민중의 큰 ‘무기’였다” “민중미술운동은 내발적 상상력을 통해 생명체로서 인간의 근원적인 저항의 욕구를 발신하려고 한 정치적 상상력의 구현”이라고 했다. “이 운동은 작품과 문헌을 책상에 모아 연결하여 미술관에 전시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익명의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요구하는 저항의 정신과 ‘현장’에 대한 ‘사람의 이야기(음성·울음소리)’를 미술이라는 방법을 취해 내놓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한국 민중미술론을 <한국의 민중미술 - 저항의 미학과 사상>에 담았다. 후루카와는 강요배, 고길천, 김구한, 김봉준, 김서경, 김용익, 김운성, 김인순, 김정헌, 노순택, 노원희, 박경효, 박영숙, 방정아, 성효숙, 신학철, 안성금, 오윤, 옥봉환, 윤석남, 이상호, 이윤엽, 임옥상, 전정호, 정정엽, 최병수, 하자영, 홍성담, 홍성민, 홍성웅 등 작가를 연구하거나 만났다. 두렁, 시각매체연구회, 현실과 발언 등 집단도 찾아갔다. 후루카와는 “작가 말고도 여러 평론가나 연구자, 큐레이터, 기자들한테도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남성 중심의 민주화운동 속 여성의 존재와 표현, 남성에 가려진 여성 미술가들의 활동을 강조하고 싶었다고도 했다. <한국의 민중미술 - 저항의 미학과 사상> 3장에 ‘민중미술의 토양에서 자란 여성들의 미술, 페미니즘과 미술을 향해’란 제목으로 여성 미술가들의 활동을 다루기도 했다. 최근 타계한 ‘5월 광주’ 연작의 작가 도미야마 다에코를 두고 “억압된 여성 문제를 시민운동과 연계하고, 연대한 페미니즘의 선구자”로 평가했다. 후루카와는 ‘도미야마 다에코의 예술과 사상 연구회’ 일원이다. 지금 추모 원고를 쓰는 중이다. 2000년 광주비엔날레 ‘예술과 인권’전 때 함께 광주를 찾은 일을 떠올렸다. “민주화운동을 위해 싸운 운동가, 문학자나 예술가, 목사나 신부 등 도미야마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큰 환영을 받았다. 같은 일본인으로서 광주와 연대한 미술가의 존재에서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후루카와의 연구와 비평의 지평은 한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조선, 중국, 대만, 만주국, 오키나와 등 동아시아로 확장했다. 그는 “‘어둠의 역사’를 시각화하고 함께 생각하려고 ‘동아시아 문화론’이라는 제목의 미술 전시를 기획했다. 전쟁과 무력, 야스쿠니, 오키나와 전쟁과 미군기지, 원자력발전과 환경, 천황제 문제를 전시에서 구현했다. 2006년에서 2013년까지 ‘열도의 예술 고고학 21세기 동아시아 문화론’ 연속 기획전을 매년 개최했다. 2008년 ‘예술로 표현하는 야스쿠니’, 2015년 ‘동아시아의 야스쿠니즘’ 등을 열었다. 야스쿠니 반대 시위에도 매년 참여했다.
후루카와는 학문적 정체성을 ‘조선미술문화연구’로 규정한다. “남북한을 나눠 파악하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 재일동포와 이산한 디아스포라의 미술문화를 볼 수 없다. 조선민족(한민족)의 미술문화를 종합적으로 탐구한다는 의미를 담아 ‘조선미술 연구’라고 칭한다”고 했다. 지금 도쿄외국어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후루카와는 북한의 사상 형성과 시각적 표상의 관계를 연구 중이다. 한반도의 남북 미술을 중심으로 재일동포와 일본과의 접점을 찾는 ‘남북을 넘어갈 미술’이란 제목으로 일본 부인민주클럽 신문에 글을 보내고 있다.
후루카와는 수상 뒤 ‘김복진은 무엇을 꿈꾸고 있었던 것일까’를 고민한다고 했다. “도쿄미술학교(현 도교예술대학)에서 서양 근대 조각을 조선인으로서 처음 배우고, 귀국 후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을 주도해 투옥됐다. 출옥 후 불상을 만들다 급서했다. 김복진이 조각한 미륵불상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다. 침략당하는 고난 속에서 한반도 민중은 미륵신앙에 희망을 빌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반도의 리얼리즘을 시도하려 한 김복진의 꿈을 상기하면서, 한반도의 분단과 단절을 초래한 일본인으로서 앞으로도 문화적 책임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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