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서 열린 공존의 문

이제훈 2021. 9. 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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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훈의 1991~2021]이제훈의 1991~2021 _11
1994년 6월17일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과 지미 카터 미합중국 전 대통령이 남포시 서해갑문을 배를 함께 타고 둘러보고 있다. 그해 6월 김일성과 카터의 역사적 대좌는 한반도를 뒤덮은 전쟁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로 가는 결정적인 디딤돌을 놓았다. 서해갑문 앞에서 김일성은 ‘조건 없는 남북정상회담’에 응하겠다는 뜻을 카터한테 밝혔고, 카터는 미국에 가기 전 서울에 들러 이를 김영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한테 전했다. <노동신문> 1994년 6월18일치 1면 부분 촬영.

‘카터 방북’을 명분으로 정면충돌 위기를 모면한 북-미는 ‘김일성의 죽음’(1994년 7월8일)이라는 초대형 돌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해 10월21일 ‘제네바 기본합의’에 이르렀다. 강석주는 합의 당일 제네바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문건”이라며 거듭 만족감을 드러냈다. 북을 인정하지 않으려던 미국을 상대로 사상 처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이 적시된 문서 합의를 이끌어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북폭 계획’을 입안한 미국의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과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 주역인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차관보는 ‘1994년 봄, 한반도’에서 “8월의 포성”(The Guns of August)의 그림자를 봤다고 했다. ‘8월의 포성’은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 한달’을 정밀 추적한 바버라 터크먼의 명저다. ‘8월의 포성’이란 아무도 바라지 않았으나 1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류사 최초의 총력전의 불쏘시개가 된 숱한 오해와 우연과 엇갈린 셈법의 비유어다. 94년 봄 주한미군이던 하월 에스테스 중장은 “모두가 전쟁이 임박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고 돈 오버도퍼는 <두 개의 한국>에 적었다.

94년 3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북핵 검증 실패’ 선언과 남북 당국 회담 와중의 “서울 불바다” 발언 사태 탓에 빌 클린턴 미 행정부는 3월21일로 예정된 3차 북-미 고위급회담을 일단 취소했다. 국제원자력기구가 3월21일 북핵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는 결의를 채택했는데, 중국은 반대하지 않았다.

북은 전광석화와 같은 위기 고조 조처로 출로를 뚫으려 했다.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행태다. 4월10일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를 멈췄고, 5월12일부터 원자로에서 사용후핵연료봉을 꺼냈다. 미국은 맞불을 놨다. 4월11일 미국의 패트리엇 미사일이 부산항에 들어왔고, 이어 아파치 헬기와 브래들리 전차 등이 속속 한반도에 배치됐다. 한-미 국방장관은 94년엔 팀스피릿훈련을 취소한다는 3월3일 발표를 뒤집고 11월에 훈련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과 존 섈리캐슈빌리 합참의장은 5월18일 미국의 모든 현역 4성 장군과 해군제독을 워싱턴 펜타곤으로 불러모았다. 게리 럭 주한미군사령관의 전쟁 계획을 어떻게 협력해 실행할지 ‘실전 회의’가 목적이었다. 다음날 국방장관·합참의장·주한미군사령관은 군 최고통수권자인 클린턴 대통령한테 회의 결과를 보고했다. 전쟁이 나면 첫 석달에만 “미군 사상자 5만2천명, 한국군 사상자 49만명” 등 엄청난 인명 피해에다 막대한 전쟁 비용이 필요하며 이는 온전히 미국이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클린턴은 다음날인 5월20일 외교안보 분야 고위 회의를 소집했다.

북은 6월15일까지 사용후핵연료봉 8천개를 모두 꺼냈다. 아무도 예상 못한 놀라운 ‘속도전’이었다. 더구나 북은 사용후핵연료봉을 마구 뒤섞었다. ‘중대한 불일치’ 문제를 포함한 북의 과거 핵활동 검증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진 것이다. 국제원자력기구의 검증 전문가 디미트리 페리코스는 북의 이런 행태를 “포커 게임”에 비유했다. 북이 핵물질(플루토늄)을 얼마나 확보했는지 외부세계가 정확히 모른다는 사실을 핵게임의 ‘비장의 카드’로 쓰고 있다는 지적이다.

6월2일 한스 블릭스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은 북의 과거 핵활동을 검증할 수 없게 됐다고 유엔 안보리에 보고했고, 로마에 있던 클린턴은 대북제재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노동신문>은 “‘제재’는 곧 전쟁이며 전쟁에서는 자비가 없다”는 구호를 각 면의 머리띠로 큼지막하게 펼쳤다.

북의 강경 기조뿐 아니라, 이라크에서의 핵사찰 실패로 망가진 체면을 북을 상대로 만회하려는 듯한 국제원자력기구의 태도에도 비난이 쏟아졌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대사는 “북에 어떤 혜택도 주지 않고 고통스러운 조사만 하려 드는 꽉 막힌 항문병 전문의”라고, 갈루치는 “중세적, 탈무드적 경직”이라고, 국방부 고위관리는 “광신자”라고 비난했다고 오버도퍼는 전했다.

그런데 시끄럽게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고 했던가? 겉보기에 북-미는 충돌 직전의 마주 달리는 열차 같았지만, 물밑에선 김일성 주석과 클린턴 대통령이 충돌을 회피할 출로를 모색하느라 분주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적대국가의 두 최고지도자를 이어줄 적임자였다. 김일성은 91년부터 해마다 카터한테 방북 초청장을 보내며 공을 들였고 카터도 평양에 가고 싶어했지만 국무부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된 터다.

클린턴이 결단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공식 사절이 아닌 민간인 자격으로 행동한다”는 조건으로 방북을 승인하고는, 갈루치를 보내 정세·현안 브리핑을 해줬고 국무부의 북한 전문가를 방북 수행원으로 딸려 보냈다. 클린턴은 5월29일 중국의 무역최혜국(MFN) 대우를 연장할 계획이라고 발표해 중국에 ‘선물’을 안겼고, 중국은 북에 ‘협상’을 압박하는 걸로 화답했다.

집권 초기 ‘북핵 문제’에 발목이 잡히고 싶지 않던 클린턴은 5월20일 회의 이후 ‘북폭’ 등 군사 대응이 아닌 협상과 제재의 ‘두 궤도 접근’으로 무게중심을 조심스레 옮겼다. 클린턴은 논란이 많은 카터의 방북을 승인한 일과 관련해 “나는 그들이 ‘전직 미국 대통령이 이 나라에 왔다’고 말할 수 있으면 곧 물러설 거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갈루치, <북핵 위기의 전말> 293쪽) 페리는 “우리는 전면전을 회피할 방법을 찾고 있었지, 전면전을 촉발할 방법을 모색한 게 아니다”라고 회고했다.

94년 6월13일 카터가 평양에 가려고 서울에 들렀다. 이즈음 <시비에스>(CBS)·<타임>의 공동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1%가 북이 사찰을 계속 거부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핵시설을 파괴해야 한다는 방안에 동의했다. 한반도를 뒤덮은 전쟁 위기감에 서울에선 주가가 폭락했고, 시민들은 쌀·라면·양초 따위를 사재기하며 ‘피난 준비’에 허둥댔다.

6월15일 카터가 판문점을 거쳐 평양으로 갔다. 다음날 아침 제임스 레이니 당시 주한대사는 한국에 있던 세 손주한테 사흘 안에 미국으로 떠나라고 당부했다. 대재앙 전야처럼 한반도는 극도의 혼란에 흔들렸다.

김일성은 전직 미국 대통령과 첫 만남을 체면을 잃지 않고 위기에서 빠져나올 기회로 능숙하게 활용했다. 그는 “착한 경찰”(good cop)을 자임했다. 김일성은 6월16일과 17일 이틀 연속 카터와 회담을 했다. <노동신문>은 이를 연이틀 사진과 함께 1면에 대서특필했는데, “호상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에 대해 진지한 담화”가 이뤄졌다면서도 구체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북-미 고위급회담 북쪽 단장인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이 배석했다. 김일성과 카터는 두차례 회담에서 ‘핵동결↔경수로 제공’ 교환 방안에 공감했고, 카터는 김일성한테서 6월22일로 비자가 만료될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의 영변 체류 연장을 확약받았다. 김일성은 6월17일 남포 서해갑문 참관 때 카터한테 ‘조건 없는 남북정상회담’에 응하겠다고 밝혀, 남북관계를 위기 탈출의 안전판으로 삼았다.

사실 카터는 ‘민간인 자격’으로 방북한 터라 미국 정부를 대표해 협상할 권한이 없었지만, 능란한 솜씨로 길을 텄다. 카터는 김일성과 첫 만남 뒤 백악관으로 전화해 논의 결과를 설명하곤 방북에 동행한 <시엔엔> 생중계로 관련 내용을 공개하겠다고 사실상 ‘통보’했다. 노회한 기정사실화 전략이다.

클린턴이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추진을 최종 승인하고, 합참의장이 한반도에 병력을 증파하려면 예비군 소집이 불가피하다는 보고를 하던 백악관의 회의장은 순간 카터의 ‘월권’ 성토장으로 급변했다. 클린턴은 고심 끝에 카터의 <시엔엔> 회견 내용을 (외면·폄훼하지 말고) 미국에 최대한 유리하게 유권해석하는 식으로 대응하라고 지시했다고 당시 카터의 전화를 받은 갈루치는 회고록에 적었다. 미국은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에 연료봉을 재장전하지 않는다’를 협상의 조건으로 새로 내걸었다. 이는 기존 조건이던 ‘이미 인출한 사용후연료봉 재처리 금지’보다 수위가 훨씬 높은 것인데, 뜻밖에도 북은 군말 없이 바로 받아들였다.

‘카터 방북’을 명분으로 정면충돌 위기를 모면한 북-미는 ‘김일성의 죽음’(1994년 7월8일)이라는 초대형 돌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해 10월21일 ‘제네바 기본합의’에 이르렀다. 강석주는 합의 당일 제네바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문건”이라며 거듭 만족감을 드러냈다. 북을 인정하지 않으려던 미국을 상대로 사상 처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이 적시된 문서 합의를 이끌어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노동신문>은 “미합중국 대통령 빌 클린톤(턴)”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김정일 각하”한테 합의 이행 담보 서한을 보냈다는 소식을 94년 10월23일치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제네바 기본합의’는 2002년 10~12월 조지 부시 미 행정부가 이른바 ‘2차 북핵 위기’를 빌미로 파기할 때까지, 8년간 ‘한반도 평화’의 핵심 기반이었다. 무엇보다 북-미 양국 모두 외교 협상으로 공존의 길을 열 수 있음을 실제로 확인한 첫 경험이라는 점에서,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밝히는 길 안내자라 할 수 있다.

이제훈ㅣ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여섯 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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