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와 6월항쟁·촛불 '자랑스러운 혁명사' 더 발전시켜야죠"

강성만 2021. 9. 6. 18:3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짬]【짬】동아투위 김종철 전 위원장

최근 200자 원고자 2600매 분량의 자서전을 전자책으로 펴낸 김종철 전 동아투위 위원장. 강성만 선임기자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삶 속으로 기자들이 직접 들어가 취재하면 좋겠어요. 그렇게 해야 민중들이 어떻게 사는지 주권자들이 알 수 있잖아요. 그런 취재가 기자로서 보람도 클 겁니다.”

최근 자서전 <함·께·왔·다 우리 이 길을>(총 4권)을 전자책으로 낸 김종철(77) 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장이 후배 언론인들에게 가장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그는 유신 독재 시절인 1975년 자유언론투쟁을 하다 <동아일보>에서 내쫓긴 해직기자다. 1988년 <한겨레> 창간 때 합류해 논설위원으로 필봉을 휘두르다 1998년 퇴직하고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사장을 지냈다. 2013년부터 재작년까지 동아투위 위원장을 지냈고, 해직기자들 중심으로 7년 전 출범한 자유언론실천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아 4년 동안 이끌었다. 지금은 <뉴스타파> 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지난 31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자택에서 김 전 위원장을 만났다.

자서전 2권 표지.

서울대 국문학과 4학년이던 1967년 동아일보에 들어간 저자는 동료 기자들과 함께 1974년 3월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지부를 만들었다. 비록 법외 노조이지만 한국 현대사의 첫 기자 중심 노조였다. 설립 신고 이틀 만에 노조 가입 대상자 3분의 2가 넘는 173명이 가입했다. 노조와 별도로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도 자유언론실천 특위를 만들어 매일 보도 감시를 하고 그 결과를 분회보에 실었다. 이런 노력은 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 180여 명이 참여한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결실을 보았다. “노조가 생기고 특위 활동도 하면서 지면이 바뀌었죠. 신문에 매일 대학가 시위 기사도 실리고, 편집국에 상주하던 중앙정보부 직원도 자취를 감췄어요. 중정 과장급인 이 기관원은 매일 아침 출근해 신문 대장이 나오기도 전에 정치부장 자리에 가서 그날 머리기사가 뭔지 확인하고 이 기사는 안 된다고 압력을 넣었죠. 심지어는 사장실까지 올라갔어요.”

이런 희망의 기운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은 신문사에 광고탄압을 했고 결국 동아일보는 75년 3월 기자·피디 113명을 거리로 내몰았다. 저자의 67년 입사 동기 22명 중 17명이 해직당했다. 신문사에서 쫓겨날 때 그는 영등포 시장에서 채소 노점을 하던 모친과 함께 다섯 동생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해직되고 며칠 만에 시장에서 어머니를 만났지만 차마 쫓겨났다는 말을 할 수 없었어요. 모친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을 테니까요.”

아무리 독재라고 하지만 어떻게 대량 해고가 가능했을까? “자유언론실천선언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최초 선전포고였어요. 노조가 생기고 언론개혁운동을 하면서 지면에 파격적인 변화가 있었어요.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는 기자들이 노조를 만들어 정권을 뒤엎으려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다른 신문사로 번지기 전에 노조 핵심 세력을 다 내보내라고 신문사에 지시한 거죠.” 그는 “동아투위 113명 중 약 40명이 세상을 떴다”며 “회사는 단 하루라도 해고자들을 정식 복직시키고 명예회복과 응분의 보상을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해직기자 김종철은 박정희·전두환 정권에서 세 차례 옥고를 치렀다. 75년 노조 농성장에서 술에 취한 ‘노조 이탈 조합원’을 밖으로 내보내다 폭력범으로 몰렸고, 78년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 기념식 때는 ‘선언문을 눈으로 따라 읽었다’는 해괴한 이유로 구속됐다. 재야단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대변인으로 활동하던 87년에는 5·3인천 사태 주동자로 몰려 투옥됐다. “저는 심한 고문은 당하지 않았지만 동아일보 2년 후배 홍종민씨는 전두환이 계엄령을 내린 80년 5월에 체포돼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만 44살에 세상을 떴어요. 석방 뒤에도 공포에 질려 말을 못하더군요.”

언론사 세 곳에서 기자와 논설위원, 사장으로 18년 가까이 일한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취재로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을 꼽았다. 노태우 정부 시절 문 목사는 북한 초청으로 방북했는데 남한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한에 돌아와 구속됐다. “제가 그때 한겨레 논설위원이었어요. 민통련 의장을 지낸 문 목사님과 인연이 있다는 이유로 신문사에서 저를 방북하고 일본에 있던 목사님에게 보냈어요. 목사님이 저를 반가워하며 ‘내가 감옥에 가는 것은 좋은데, 왜 북에 갔는지 또 김일성 주석과 남북통일 원칙에 대해 주고받은 말을 신문에서 잘 전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이 대화 내용으로 한겨레에 기사도 썼죠. 당시 보수신문들은 문 목사가 이적행위를 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죠.”

최근 전자책 4권으로 자서전
언론 활동과 사회운동 삶 담아
75년 해직…‘한겨레’ 창간 참여
“문익환 목사 방북 취재 가장 기억”

“경제·교육 등 더 많은 혁명 필요
민중 삶 보여주는 기사 늘었으면”

가장 기억에 남는 칼럼을 묻자 그는 ‘임수경의 ‘사랑이여 조국이여’’란 제목의 한겨레 ‘아침햇발’(89년 9월) 글을 꼽았다. “89년 6월 평양을 찾은 임수경을 두고, 젊은이가 선구적으로 방북해 남북 사이 적대감도 해소하고 결과적으로 통일로 가는 실마리를 놓았다는 취지로 쓴 글이죠. 칼럼이 나간 날 신문사에 전화가 많이 왔어요. 다른 신문들이 냉전적 보도를 할 때라 이런 글이 한겨레 영향력 확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70년대 후반부터 문학평론 활동도 해온 그는 84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창립을 이끌었다. 84년엔 산문집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로 3회 신동엽문학상을 받았다. “해직 뒤 번역하며 살았는데 이 일이 너무 기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제 글을 쓰기 시작했죠. 대학 동기인 정희성 시인이 78편에 낸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 발문을 실었는데 이 글을 본 백낙청·염무웅 선생이 문학평론을 권한 게 계기였죠.” 그는 “5·3사태로 수배당할 때 집에서 압수당한 문학평론 책 3권 분량의 원고를 끝내 찾지 못했다”고도 했다.

그는 자서전 끝에 “한국 사회에 더 많은 혁명이 필요하다”고 썼다. “제가 겪은 첫 혁명이자 정치적 경험이 4·19였죠. 서울 동성고 1학년 때인데 주번만 빼고 전 학생들이 경무대 앞까지 행진했어요. 제 옆에서 2학년 학생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아 피를 흘리는 모습도 봤어요. 그때 동성고 학생 14명이 부상했어요. 4월 혁명과 6월항쟁, 촛불 혁명은 민중의 열망이 담긴 위대한 혁명입니다. 우리 현대사의 선진성과 진보성은 여기서 나왔어요. 세계 어디를 가도 이런 자랑스러운 혁명사를 찾아볼 수 없어요. 촛불 혁명을 보세요. 연 2천만명이 참여했지만 구속자도 폭력 사태도 없었죠. 이 역사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노동, 종교, 여성 등 더 많은 분야에서 혁명이 필요해요. 파괴적인 해체가 아니라 대중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생산적인 변화를 만들어야죠. 경제는 없는 사람들과 조금 더 나누는 정책이 필요하고 문화도 청년 학생들에게 꿈과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행사와 정책을 많이 만들어야죠. 하지만 요즘 여당 정치인들을 보면 내가 일인자가 되겠다며 너무 세속적인 권력에 집착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거시적인 정책 제시보다는 지역에 가서 표가 되는 이야기만 하고 있어요. 지난 혁명의 정신과 이념을 받드는 정부를 만들겠다는 후보가 나와야 합니다.”

김종철 전 동아투위 위원장. 강성만 선임기자

고은 시인은 시집 <만인보 10권>에서 저자를 두고 “그의 노래는 당장 혁명이 일어날 듯한 노래이다/ 그의 그칠 줄 모르는 말은/ 당장은 아니지만/ 내일 모레쯤/ 혁명이 일어날 듯한 말이다// 그는 압축된 공기로 찬/ 팽팽한 공이다/ 가장 세게 찬 공이다”고 노래했다.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키웠냐고 하자 그는 기자 초년생 때라며 이렇게 말했다. “될 수 있으면 기자실에 있지 않고, 광주 대단지 사건 판자촌 빈민 등 어려운 사람들을 직접 찾아 현장 취재를 많이 하려고 했어요. 다른 신문사가 아니라 당시 야당지인 동아일보 기자라 가능한 측면도 있었죠. 제가 어린 시절 집이 잘살다가 이승만 토지 개혁 이후 가세가 기울어진 영향도 있었을 겁니다. 조부가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의 600석 대지주였는데 토지 개혁 이후 논 20마지기만 남았죠.”

마지막으로 ‘인생의 사표’가 누군지, 물었다. “문익환 목사가 먼저 생각나요. 그분은 단순한 성직자가 아닙니다. 제가 민통련 때 모셨는데 다른 분들은 나이가 들면 위축되고 약해지는데 그분은 생각과 실천이 나날이 젊어져요. 억눌린 사람들과 정치 사회 민주화를 위한 운동에 늘 열려 있었죠. (문 목사에게) 누가 과격하다고 해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죠. 이북 출신인 부친(문재린)과 모친(김신묵) 등 집안의 진보적 성향도 영향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