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과 지상 잇는 '사랑의 전령'.. 여왕들도 홀린 '꽃의 여왕'
■ 지식카페
박원순의 꽃의 문화사 - ⑦ 장미
3000년전 이집트 등서 처음 재배… 클레오파트라·나폴레옹의 황후 조제핀은 잠 잘때에도 곁에 둬
찔레·해당화 등 국내에 뿌리 내린 장미의 일종… 향수·의약품·패션 넘어 식용으로도 널리 활용
장미보다 할 이야기가 많은 꽃이 또 있을까. 명실공히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꽃답게 장미는 다방면에 걸쳐 아주 오랜 역사와 풍부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무수히 많은 정원을 비롯해 사랑과 치유가 필요한 모든 공간 속에서 장미는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존재해 왔다. 정원이 아닌 곳에 핀 장미꽃은 있어도, 장미꽃 한 송이 없는 정원은 드물다. 장미는 정원 밖에서도 인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의학과 향수, 요리, 패션 등 실용적 용도뿐 아니라 종교와 예술, 문학 등 분야를 망라한다.
장미꽃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는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여왕, 혹은 로마 시대 네로 황제일 수도 있고, 각자 좋아하는 장미 향수 또는 장미향 가득한 대규모 축제 정원에서의 추억들, 혹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장미꽃을 주었거나 받았던 추억일 수도 있다. 아마도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장미꽃의 변하지 않은 불변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구절일 것이다. “이름이 뭐가 중요할까? 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장미는 똑같이 달콤한 향기가 날 것을.”
언제부터 장미는 꽃의 대명사, 꽃의 여왕이 돼 오늘날에 이르게 됐을까? 장미꽃이 지구상에 처음 출현한 증거는 미국 콜로라도에서 발견된 장미 화석으로, 약 4000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인류가 장미를 재배하기 시작한 시기는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중국 등 고대 여러 지역에 걸쳐 대략 3000년 전쯤으로 보고 있다. 기원전 2000년기 초기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장미를 묘사한 프레스코 벽화가 발견됐다. 그 장미는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화려한 품종의 장미와는 많이 달랐다. 이집트 상나일 지역에서 들여온 로사 리카르디(Rosa x richardii), 로사 카니나(R canina) 등으로 추정되는데 모두 향기가 좋은 홑꽃 종류였다(안타깝게도 전자는 이미 멸종된 지 오래다). 당시 미노아 문명에서 장미는 화분에 재배됐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장미가 역사적으로 전 세계에 걸쳐 큰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여러 신화와 전설 속에서 강한 상징성으로 자리매김한 이래로 꾸준히 왕실과 귀족들의 사랑을 받아온 덕이 크다. 기원전 14세기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세 4세의 무덤 벽화에도 장미 그림이 나오는데, 장미의 흔적들은 무덤 안 곳곳에 있었고 미라에서도 발견됐다. 장미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꽃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이때 사용된 장미 역시 에티오피아에서 온 거룩한 장미 로사 리카르디였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69년∼기원전 30년)는 일상생활을 늘 장미와 함께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거처엔 장미꽃이 가득했고 공개석상에서도 늘 장미꽃이 뿌려졌다. 언제까지나 향기를 풍기는 여신으로 기억되길 바랐던 것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장미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의 눈물로 피어난 꽃이 됐고, 사랑에 대한 강한 상징성으로 장미들이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오늘날에도 장미유나 장미수를 얻기 위해 많이 재배하는 다마스크 장미(R damascena), 로사 갈리카(R gallica), 로사 포이니키아(R phoenicia), 로사 카니나(R canina), 로사 알바(R x alba) 같은 장미들이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로마 시대에 장미는 허영에 가까웠다. 네로 황제는 병적으로 장미에 집착했다. 그는 파티가 열릴 때면 장미 화관을 쓰고, 어마어마한 양의 장미 꽃잎을 만찬장에 쏟아 부었다. 잠을 잘 때는 장미 꽃잎 베개를 사용하고, 수영장과 분수에도 장미수를 넣도록 했으며, 술과 디저트에도 장미 향을 첨가했다. 로마의 귀족들도 장미를 부의 척도로 삼아 경쟁적으로 커다란 장미원을 조성했다.
로마 제국의 멸망 후 장미에 대한 인기는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고, 이슬람 세계에서 그 명맥이 유지됐다. 무슬림에게 붉은색 장미는 유일신 알라를, 흰색 장미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상징했다. 티무르 왕자들의 정원과 타지마할의 정원에 장미원이 조성됐고, 페르시아 샤 압바스의 정원엔 붉은색과 노란색 꽃잎을 가진 다마스크 장미와 사향 장미가 피어났다.
혼돈의 중세 시대를 거치며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는 궁전에서 장미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유럽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장미는 815년 건립된 독일 힐데스하임의 가톨릭성당에 식재된 장미(R canina)로, 1000년을 넘도록 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대성당이 파괴된 후에도 이 장미의 뿌리는 살아남아 다시 싹을 틔웠다.
12∼13세기 동안 중동 십자군 원정을 통해 다양한 장미가 유럽으로 도입됐다. 그중에는 원래 로마 시대 약효로 유명했던 로사 갈리카 ‘오피키날리스’(R gallica ‘Officinalis’), 반겹꽃의 자홍색 꽃이 피는 로사 갈리카, 그리고 분홍색과 흰색 줄무늬 꽃잎을 가진 로사 갈리카 ‘버시컬러’(R gallica ‘Versicolor’)도 포함됐다.
13세기 유명한 소설 기욤 드 로리스와 장 드 묑의 ‘장미 이야기’는 연인에 대한 사랑을 상징하는 장미가 있는 정원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군상의 신변잡기적 철학을 담고 있다. 그 시대 장미는 트렐리스를 타고 자라거나 정원을 두르는 울타리용으로 식재되기도 했다.
15세기 영국에서는 유명한 장미 전쟁(1455∼1487)이 발발한다.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6세 왕과 요크 가문의 귀족들 사이에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갈등이 불거져 무려 30년 동안이나 소규모 전투와 교전이 간헐적으로 계속됐던 전쟁이다. 마침내 전쟁은 랭커스터 가문의 승리로 마무리됐고 헨리 7세는 1486년 요크 가문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새롭게 튜더 가문을 세웠다. 헨리 7세는 통합된 두 가문을 상징할 수 있도록 랭커스터 가문의 붉은 장미와 요크 가문의 흰 장미를 결합시킨 튜더 장미를 만들었다. 튜더 장미는 정권을 통합하고 민심을 추스르기 위한 헨리 7세의 강력한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탄생한 화합과 통일의 상징이었다.
17세기엔 북아메리카의 새로운 장미들도 유럽으로 건너왔다. 대표적인 종은 100개 이상의 꽃잎을 가진 로사 센티폴리아(R centifolia)다. 양배추 장미라고도 불리는 이 장미는 강건하고 향기가 좋아 반 데 파스, 피에르 모린 등 유명 화가들이 꽃 그림을 그린 화보집에도 단골 아이템으로 수록됐다.
19세기 초 프랑스 나폴레옹의 황후 조제핀의 장미 사랑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하다. 나폴레옹이 제국을 장악하는 동안 조제핀은 파리 외곽 20㎞ 서쪽에 위치한 말메종 섬을 1798년에 인수하고 1814년에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곳에 자신만의 정원을 만들고 가꿨다. 말메종 정원엔 식물학자 에티엔 피에르 벵트나, 수석 원예가 앙드레 뒤퐁, 그리고 전속 화가 피에르 조제프 르두테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조제핀과 함께했다. 조제핀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는지 영국과 전쟁 중에도 말메종으로 식물을 싣고 가는 배는 영국 해협을 통과하는 특별 여권을 부여받기도 했다.
그녀가 수집한 식물 컬렉션에는 250종에 달하는 장미가 포함됐다. 그녀는 고전 장미를 가장 많이 모은 수집가였고 몇몇 새로운 품종도 개발하기도 했다. 사탕수수 농장을 소유한 부유한 가문 출신의 조제핀은 원래 이름에 로즈가 들어 있어 결혼 전에는 로즈로 불렸고, 평소 장미향을 무척 즐기며 뛰어난 미모로 사교계를 사로잡았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단두대 이슬로 사라진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의 식물 화가이기도 했던 르두테는 말메종 섬에서 조제핀의 식물 화가가 돼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조제핀이 수집한 250종의 장미 가운데 117종을 그림으로 남겼고, ‘레 로제’(Les Roses)라는 아름다운 화보집에 수록했다.
조제핀이 말메종에 장미를 수집할 무렵은 중국에서 월계화(R chinensis) 등 흥미로운 장미들이 도입되고 있던 시기였다. 인공수분을 통한 육종 기술이 체계화되면서 새로 도입된 장미들은 유럽의 고전 장미들과 교잡을 통해 꽃의 색깔과 형태, 개화시기, 향기 등에 있어 혁신적 변화를 나타냈다. 역사상 동서양의 만남 중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건이 있었을까? 장미의 새로운 시대는 1867년에 개막했다. 프랑스 리옹의 육종가 장 밥티스트 기요가 육종한 라 프랑스(La France)라는 하이브리드 티(hybrid tea) 품종의 탄생이 기폭제가 됐다. 1867년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고전 장미와 그 이후 쏟아져 나온 현대 장미를 구분 짓는 기준년이 됐다.
사계절 꽃 피는 중국산 야생장미와 향기가 뛰어난 유럽 야생종의 만남은 꽤 신선했다. 곧게 뻗은 가지 끝에 한 송이 커다랗고 아름다운 꽃이 달리는데, 한 번만 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피어나니 그때까지 없었던 장미의 신세계를 맞게 된 것이었다. 진홍색과 노란색, 보라색 등 새로운 꽃 색깔을 보게 된 것도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 외 플로리분다, 클라이머, 그랜디플로라, 랜드스케이프, 램블러, 관목 등 여러 계통의 장미들이 쏟아져 나왔다.
새로운 현대 장미 품종들은 여러 좋은 점이 많았지만 향기가 많이 약화됐다. 육종 과정에서 대부분 향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젊음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 같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에 대해 데이비드 오스틴이 1961년부터 내놓기 시작한 영국 장미들은 고전 장미의 매력을 부활시키기 위해 개발한 품종들로 근래에 인기가 아주 높다.
20세기를 지나 오늘날까지도 장미의 인기는 정원에서 정원으로 계속 이어져 왔다. 트렐리스나 아치에 자라는 장미는 영국의 히드코트 매너나 시싱허스트 같은 세계적인 정원의 필수 아이템이었다. 특히 시싱허스트의 화이트 가든에서 볼 수 있는 덩굴장미 로사 물리가니(R mulliganii)는 매우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린 장미도 여럿 있다. 가령 꽃이 사철 계속 핀다는 뜻의 월계화(Rosa chinensis)는 15세기 강희안이 저술한 원예서 ‘양화소록’에도 기록돼 있다. 종명에 우리나라를 뜻하는 코레아나(koreana)가 붙은 흰인가목(R koreana), 찔레(R muliflora), 돌가시나무(R wichuraiana), 용가시나무(R maximowicziana), 그리고 바닷가에 피는 해당화(R rugosa), 노랑해당화(R xanthinoides)도 모두 이 땅의 장미들이다.
장미는 식용도 가능하다. 꽃잎에는 항산화 작용에 좋은 안토시아닌과 베타카로틴이 풍부하고, 로즈힙이라고 불리는 열매에는 천연 비타민 C가 레몬의 20배나 들어 있다.
향기와 꽃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고 지구 곳곳에서 사랑과 치유의 마법을 펼쳐 온 장미는 앞으로도 지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등 공신으로 영원히 남을 만한 꽃이다.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
■ 로사 갈리카(Rosa gallica)
장미과의 낙엽 관목으로, 프랑스 장미(French Rose)라고도 부르는데, 종명인 갈리카(gallica)는 프랑스를 뜻한다. 유럽 중남부가 원산지로 키는 1.5m까지 자란다. 5장 이상의 진분홍색 꽃잎을 가지며, 향기가 좋다. 중유럽에서 가장 먼저 재배된 장미 종류 가운데 하나다. 많은 현대 장미 품종이 로사 갈리카의 후손으로 육종됐다. 배수가 잘되는 사질 양토를 좋아하며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잘 자란다. 겨울철엔 영하 25도까지 월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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