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드'의 진화가 만드는 전기의 미래 [찌릿찌릿(知it智it) 전기 교실]

손성호 | 한국전기연구원 선임연구원 2021. 9. 5.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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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테러범이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그들의 공격 대상은 전력망 등 기반 시설인 경우가 많다. 발전소와 변전소 등 전력망 구성 요소를 마비시켜 직간접적인 피해를 유발하고 전반적인 사회 대응체계도 함께 무너뜨린다. 이러한 설정은 현대사회의 전력망에 대한 의존도가 그만큼 높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에너지 산업에서 ‘그리드(Grid)’라는 단어는 전기의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기까지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연결된 네트워크, 즉 전력망을 의미한다. 이는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소, 송전 및 배전을 위해 전압을 변환시키는 변전소, 이들을 연결하는 송전선과 배전선로 등을 포함한다.

그리드가 진화해온 역사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통합된 구조는 아니었다. 전기가 생산시설에 동력을 공급하고, 사무실·가정에서 조명을 밝히는 용도 등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에는 고작 1마일(1.6㎞) 정도밖에 전기를 보내지 못하는 직류기술의 제약 때문에 전기가 필요한 곳에 가깝게 발전기를 설치해야 했다.

또한 사용하고자 하는 기기에 따라 전압이나 주파수 등 전기적 특성들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전기들이 생산·공급됐다. 분산 및 맞춤형 소량생산 형태였다고 보면 된다. 결과적으로 소규모의 다양한 전력망이 공존하게 됐지만, 특정 수요에 맞춰 구성된 각 전력망의 가동률은 상당히 낮았고, 높은 자본비용이 반영된 요금은 전기 대중화의 장벽으로 작용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서면서 전기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중앙 집중 생산 및 통합 공급 형태의 구조를 갖추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교류라는 기술적 요소와 대량생산을 통한 효율성 제고라는 사업적 요소가 작용했다. 테슬라가 고안한 교류 시스템은 변압기를 통해 전압을 쉽게 바꿀 수 있어 발전소에서 먼 곳까지도 전기를 보낼 수 있었고, 손실도 그리 크지 않았다. 특히 나이아가라 폭포에 설치된 발전소에서 생산된 대량의 전기는 당시 개별적으로 사설 발전소를 설치하고 관리하는 것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전기를 이용하게 만들어 주었고, 요금은 지속적으로 낮아져서 전기 대중화를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20세기 초반에 1000여개에 달하던 전력회사들은 통합·재편돼 1920년대에는 상위 10여개 회사가 전체 수요의 4분의 3을 공급하는 구조로 재편됐다. 전기의 가격도 저렴해지면서 사용 고객들도 점차 증가했다. 그리고 20세기 초반 미국 사회에 등장한 ‘큰 정부’와 맞물려 효율성 제고 및 안정적 공급을 위한 독점사업 형태를 지향하는 변화가 나타나며,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전력망 구조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처럼 지금까지 그리드 성장을 주도해온 키워드는 효율성과 안정성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성장해온 그리드는 이제 또 다른 요소를 중심으로 진화해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있다. 바로 변동성에 대한 강화이다. 제도적으로 소규모 사업자의 참여가 허용되고, 분산된 형태의 다양한 전원이 늘어나면서 그리드의 복잡성은 지수함수처럼 증가하고 있다.

그리드를 운영하려면 연결된 전력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지속적으로 유지돼야 하는데 변수가 많아지고, 관계식이 복잡해짐에 따라 문제를 풀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연구를 통해 계속되고 있다. 안정성 제고와 변동성 강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그리드가 어떻게 진화해 나갈 것인지 미래의 모습이 기대되는 이유다. 앞으로 변화할 그리드의 방향은 우리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뒷받침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손성호 | 한국전기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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