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년 전 칠레 사막에서 집단 유혈극? 왜?

이정호 기자 2021. 9. 5.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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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발굴된 신석기 시대 인류의 유골. 안면의 위턱과 코 안쪽 뼈가 강한 충격을 받아 부서졌다(왼쪽 사진). 이마에는 둔기로 가격당한 흔적이 보인다(오른쪽 사진). 칠레 타라파카대·미국 툴레인대 제공

2010년 개봉한 미국영화 <더 로드>의 배경은 인류 문명이 완전히 파괴된 미래 사회이다. 영화 속에서 문명이 소멸한 이유가 명확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잿빛을 띠는 하늘과 모든 동식물이 사라진 자연환경은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한 이후의 상황을 상상하게 한다. 농사나 목축이 불가능한 지구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타인에게서 식량을 빼앗거나 훔친다. 심지어 식인 행위까지 나타나는 이런 곳에서 영화 속 아버지(비고 모텐슨)와 어린 아들(코디 스밋 맥피)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생존을 이어간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협하는 사람을 향해서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타인을 동정하는 아들에게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우라”며 윽박지른다.

■ 신석기인 시신 다수에서 ‘치명상’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땅 ‘아타카마’ 지역 고대 공동묘지 시신 분석
머리·얼굴에 상처 집중, 대부분 둔기 가격 흔적

부족한 식량 탓에 사람이 사람을 공격하는 일은 비단 영화 속 얘기만이 아니다. 지난주 미국 과학매체 사이언스얼럿에 따르면 칠레 타라파카대와 미국 툴레인대 소속 과학자 등으로 구성된 공동 연구진은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3000년 전에 살던 주민들 다수가 이웃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고 최근 국제학술지 ‘인류 고고학 저널’에 발표했다. 연구진이 지목한 유력한 원인은 기후 현상인 ‘엘니뇨-남방진동’으로 인한 식량 부족이다.

연구진이 조사 대상으로 삼은 아타카마 사막은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땅이다. 전체 면적은 남한과 비슷한 10만5000㎢인데, 연평균 강수량은 단 15㎜에 그친다. 연구진은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1000~600년 사이에 죽은 이 지역 주민들의 시신을 분석했다. 초점은 다른 사람이 때려서 생긴 상처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었다. 건조한 기후 탓에 일부 시신에선 유골은 물론 피부까지 남아 있어 더 정확한 분석이 가능했다.

연구진이 확인한 시신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아타카마 사막의 고대 공동묘지에 묻힌 성인 시신 194구 가운데 40구(21%)에서 상처가 보였다. 특히 연구진은 “상처가 있는 시신의 절반인 20구에서는 사인(死因)이 된 것으로 보이는 치명상이 확인됐다”고 논문을 통해 밝혔다.

시신에 난 상처들은 머리와 얼굴에 집중돼 있었으며, 몽둥이나 화살 같은 무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상처를 만든 타격 방향은 얼굴 앞이나 등 뒤 등 다양했다. 결투처럼 규칙이 있는 싸움이 아닌, 상대를 죽이기 위한 기습 공격과 난투극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이런 특이한 시신들은 주변 다른 지역에선 발견되지 않았다. 다른 공동체와의 전쟁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 엘니뇨-남방진동이 유혈극 원인 가능성

칠레 아타카마 사막의 신석기인 무덤에서 발견된 두개골. 뒤통수에 강한 충격을 받아 구멍이 나 있다. 칠레 타라파카대·미국 툴레인대 연구진 제공
‘엘니뇨-남방진동’으로 인한 이상기후와 식량부족이 난투극 원인
연구진 “생태학적 변화가 지역사회 폭력 유발 가능성 시사”

아타카마 사막 거주민들이 참혹한 상처를 입고 죽어간 이유는 뭘까. 연구진은 전 지구적인 기후 현상인 ‘엘니뇨-남방진동’을 지목했다. 최소 1만1000년 전부터 지속된 엘니뇨-남방진동은 동태평양 수온이 평균보다 오르거나 내리는 일이 수년 단위로 반복되는 현상이다. 칠레는 이 현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이곳에선 동태평양 수온이 높아지면 비가 많이 내리고, 반대로 낮아지면 가뭄이 든다. 엘니뇨-남방진동이 신석기 시대의 원시적인 농경사회가 견디기 어려운 수준의 이상기후를 일으키면서 작물 수확량이 감소했고, 이 때문에 남은 먹을거리와 농사를 지을 땅, 물을 사이에 둔 참극이 벌어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의 다른 연구에선 엘니뇨-남방진동이 강하게 일어났던 기원전 4000~3000년 사이에 칠레에서 인구가 감소한 적이 있다는 증거가 나온 적이 있다.

국내 기후과학계의 한 연구자는 “엘니뇨-남방진동은 강수량 차이를 유발하기 때문에 지금도 농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실제로 연구진이 분석 대상으로 삼은 지역은 아타카마 사막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비옥한 땅이었던 ‘아자파 계곡’ 주변이었다. 인근 다른 지역과 달리 식량 생산이 용이했던 만큼 인구가 집중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서 수확량이 줄었다면 먹을거리를 차지하기 위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논문을 통해 “이번 연구는 생태학적인 변화가 지역 사회 내에서 폭력을 유발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식량 부족만큼 무서운 것은 식량을 찾으려고 혈안이 된 인간들이라는 <더 로드>의 설정이 최근 확대되고 있는 전 지구적인 이상기후와 맞물려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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