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굴을 비대면으로 걷는 법

한겨레 2021. 9. 5.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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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서울 말고] 이나연ㅣ제주도립미술관장

전봇대를 세우는데 땅이 푹 꺼졌다. 2005년 전신주 공사 중에 용천동굴은 빛을 만났다. 총 길이 3.4㎞에 폭이 800m 이상인 호수가 있는 신비로운 굴은 그렇게 내내 비밀이었다. 용암동굴로 만들어지고 시간이 흐르며 탄산염 동굴 생성물이 더해져, 동굴 속은 관객 없이도 늘 멋진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종유관, 종유석, 석주, 유석, 동굴 산호가 있었고, 토기 편, 동물 뼈, 목탄, 조개껍데기, 철기, 돌탑 등과 같은 역사적인 유물도 있었다. 2010년엔 호수에서 동굴성 어류인 눈먼 물고기도 발견한다. 몇만년간 위장에 성공한 제주 자연의 신비가 근래에야 밝혀졌다.

당처물동굴은 1994년 인근 주민이 밭농사를 위해 터 고르기를 하던 중 발견했다. 동굴의 총 길이는 360m, 폭은 5~15m 정도로, 용천굴만큼 웅장하지는 않다. 하지만 좁은 공간에 수많은 종유석, 종유관, 석순, 석주, 동굴 진주가 분포하고 있다. 용천동굴과 당처물동굴 모두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보존을 위해 일반인 공개를 제한한다. 두 동굴 속에는 다른 동굴에서는 볼 수 없는 석회 성분으로 이루어진 흰색과 갈색의 동굴 생성물이 검은색의 용암동굴 속에 어우러져 있다. 이 특성은 우리나라 최초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이유이기도 하다.

만장굴은 1946년 초등학교 과학부 어린이들이 과학 선생님과 탐험해 발견했다. 김녕초등학교의 부종휴 선생은 30여명의 학생들로 꼬마 탐험대를 조직해 횃불을 들고 2m 노끈으로 거리를 재며 7000m에 달하는 미지의 동굴을 탐험했다. 동굴의 끝자락엔 세상 밖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빛이 있었다. ‘만쟁이거멀’이라는 이름이 붙은 빛이 내려오는 지상과 지하의 접점까지 총 5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당시 꼬마 탐험대가 무명의 굴에 붙인 이름은 ‘대장군굴’. 만쟁이거멀과 대장군굴을 합해 만장굴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게 1947년이고, 지금까지도 대중에게 제2입구의 1㎞ 구간이 공개되는 제주의 유일한 용암동굴이 됐다.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Jeju Volcanic Island and Lava Tubes)은 2007년 제31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정식 이름이다. 용천동굴과 당처물동굴, 만장굴을 포함하는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를 비롯해, 바다에서 솟아오른 성산일출봉 응회구, 폭포와 분화구가 있는 한라산을 포함한다.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지구의 역사를 시각적으로 드러내주는 천연 예술품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용암이 흐른 굴 위를 걷는 길, 용천동굴과 당처물동굴, 만장굴 ‘위’를 걸어, 바다로 퍼지며 흘러간 용암의 시선을 즐기고, 그 위에 새로 생긴 자연경관까지 즐겨보는 산책 코스가 10월의 시작과 함께 단 17일간의 제주 세계유산축전 기간에 공개될 예정이었다. 그 길을 따라 20명의 현대미술 작가들이 자연과 어우러지는 작품을 설치하는 아트프로젝트도 함께 할 예정이었다. ‘세계자연유산 워킹투어’ 프로그램은 특별히 이 행사만을 위해 개발됐고, 축전 기간에만 한시적으로 개방될 예정이었다. 거문오름에서 시작된 용암의 흐름을 따라 월정리 해안까지 약 26㎞에 이르는 코스는 4개의 구간으로 나눠 충분히 감상하며 걷자면 꼬박 이틀의 시간이 필요하다.

만년의 비밀을 보름 남짓만 볼 수 있는 기회에 예술이 더해진다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이들로 사전예약 사이트는 과부하가 걸렸다. 그런데 좀처럼 잡히지 않는 코로나19 확진자 수에 제주가 9월까지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를 완화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비대면으로 전환됐다. 용암이 만든 길을 두 다리로 직접 걸어볼 기회는 없어지지만, 충분히 효과적으로 걷는 것‘처럼’ 연출할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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