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원 클럽맨' 차바위, 전자랜드의 상징에서 가스공사 '핵심으로'

김우석 2021. 9. 5.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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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인터뷰는 7월 25일에 진행됐고,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1년 8월호에 게재됐습니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인천 전자랜드 프랜차이즈 스타 중 한 명이었던 포워드 차바위(31, 192cm, 포워드)가 가스공사의 초대 주장으로 완장을 찼다.
차바위는 지난 시즌 시상식에서 수비 5걸에 올랐다. 그만큼 수비와 성실함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선수다.
유도훈 초대 가스공사 감독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새로운 팀의 선장을 차바위에게 맡겼다.
코로나 19로 인해 대면이 불가했다. 전화 통화를 통해 차바위와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농구와 어머니 그리고 늦은 시작
차바위는 중학교 3학년이라는 다소 늦은 시점에 엘리트 농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문경은(50) 서울 SK 전 감독 팬이었던 어머님의 영향을 받아 농구를 즐겨보고, 즐겨했던 차바위는 다른 전문 선수에 비해 늦은 나이에 선수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가 처음 엘리트의 문을 두드린 곳은 목동에 위치한 농구 명문 양정중학교. 1년 여 동안 쉽지 않은 엘리트 농구를 접했던 차바위는 연계 학교인 양정고등학교로 진학했다.
4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운동 신경이 남달랐던 차바위는 메인 옵션으로 활약했고, 한양대로 진학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한양대에 진학했던 차바위는 3,4번을 주로 맡았다. 인사이드를 볼 수 없는 신장이었지만, 팀 사정상 파워 포워드까지 소화해야 하는 상황이 적지 않았던 것.
한양대 농구의 특징은 바로 ‘육상 농구’라는 키워드다. 신장에서 열세를 빠른 트랜지션이 바탕이 된 조직력이 장점이었다. 차바위는 빠른 트랜지션 속에서 3점포와 집중력 높은 수비력을 자신의 장점으로 남겼다. 프로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렇게 차바위는 9년이라는 길지 않은 바스켓볼 커리어 속에 농구를 직업으로 가질 수 있었다.
차바위는 “어릴 적에 어머님이 농구를 무척 즐겨 보셨다. 소위 말하는 ‘농구대잔치 세대셨다. 나 역시 자연스레 농구를 보게 되었고, 친구들보다 늦게 엘리트 선수가 되었다. 운동 신경이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어머니와 문경은이라는 키워드가 차바위를 전문 농구 선수의 길로 접어들게 한 계기였고, 농구와 연을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전자랜드 입단 그리고 고된 훈련
차바위는 신인 드래프트 전체 7순위로 인천 전자랜드(현 가스공사) 유니폼을 입었다. 2012년 이었다. 현재 서울 삼성에서 뛰고 있는 김시래가 전체 1순위로 울산 현대모비스 유니폼을 입었고, 서울 SK 원 클럽맨으로 활약하고 있는 최부경이 2순위였다.
차바위는 2라운드까지 내려가지 않았다. 장점인 3점슛과 수비력을 인정받으며 1라운드에 호명될 수 있었다.
당시 드래프트 1라운드 선수 중 은퇴한 선수는 2명이다. 박래훈과 김명진이 농구와 이별을 선택했다. 김승원(서울 SK), 최현민(고양 오리온), 박병우(울산 현대모비스), 박지훈(전주 KCC), 장민국(서울 삼성) 등은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차바위는 “팀에 들어갔는데, 동경했던 선수들이 있었다. 신기성, 강혁 선배님이 현역이었다. 내가 어릴 때 두 분의 전성기였다. 새롭고 신기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 팀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도 기뻤다.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고 전했다.
다른 기억도 소환해 주었다. 차바위는 “솔직히 안양에 가고 싶었다. (이)정현이형과 (박)찬희이형 등 당시 인삼신기로 불리던 멤버가 존재했다. 인기도, 실력도 좋았다. 당장 가서 게임은 뛰지 못해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환하게 웃었다.
프로 입단의 기쁨은 잠시였다. 차바위를 기다리는 것은 전자랜드와 유도훈 감독표 ’힘든 훈련‘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자랜드 훈련은 혹독하기로 정평이 나있었다. 현재는 조금 달라졌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트렌드를 중요시하는 유 감독이기에 현재는 이전에 비해 많이 약해지긴 했다. 예전에 비해 자율적인 선수들 성향을 반영한 과정이자 결론(?)이다.
차바위는 “프로라는 직업을 얻은 기쁨은 잠시였다. 가장 먼저 ’큰일났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훈련량에 대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막상 접해보니 상상 그 이상이었다. 역대급 비시즌이었다. 몸 만들기가 정말 힘들었다. 대학 때는 주로 4번으로 뛰었다. 감독님이 포지션 변경을 염두에 두고 가장 먼저 지시한 것이 ’체중 감량‘이었다. 그때 흘린 땀이 농구를 시작한 이후 대학 때까지보다 많았던 것 같다(웃음) 하루에 10번도 더 그만두고 싶었을 정도다. 운동이 너무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체지방이 줄었고, 민첩성이 확실히 좋아졌다. 대학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차바위는 그렇게 전자랜드 시절의 혹독했던 훈련에 대해 기억했고 언급했다.
차바위 강훈의 대명사가 존재했다. 바로 납조끼였다. 차바위는 “납조끼 역시 그만두고 싶은 이유 중 하나였다(웃음) 물론, 강제는 아니었다. 감독님께서 처음에 ’납조끼할래?‘라는 질문을 하셨다. ’못하겠다‘고 하기에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율과 강제 그 중간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 잘하고 싶은 마음도 컸기 때문에 ’해 보겠다‘라는 생각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힘든 운동을 견뎌낼 수 있는 원동력이 궁금했다. 사실 이 정도 훈련을 견뎌낸 선수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까지 자신에게 익숙한 포지션이 아닌, 앞선으로 변경을 위한 과정이었기에 더욱 혹독할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 되었을 것이다.
차바위는 “무조건 가족이다. 아니면 당장 그만두었을 것 같다. 어머니와 누나 생각을 많이 했다. 나 때문에 너무 고생을 하셨다.”고 전했다.
그렇게 차바위는 자신의 농구 인생 최대 위기를 가족이라는 키워드로 넘어서며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성공적인 데뷔전, 성실함의 대명사 ’차바위‘
인상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첫 경기는 2012년 10월 13일 서울 SK 전이었다. 무려 27분 41초를 뛰면서 13점을 쓸어 담았다. 3점슛 5개 중 3 개가 림을 갈랐고, 2점슛 두 개를 시도해 모두 성공시켰다. 필드골 성공률이 무려 71.4%였다. 수비는 합격점이었다. 출전 시간이 증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후 차바위는 승승장구했다. 54경기 전 게임에 출장했다. 성공적인 데뷔 시즌이었다. 평균 21분 41초를 뛰었고, 4.8점 2.2리바운드 1.3어시스트를 남겼다.
차바위는 “처음에는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첫 경기가 좋았다. 기대 이상이었다. 계속 기회를 부여받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 번째 경기가 기억에 남는다. 미션이 ’양동근을 막아라‘였다. 무득점으로 묶었다. 그러다 보니 수비에 재미를 느꼈다. 이후 자주 상대 에이스 수비에 대한 주문을 받았다. 어느 정도 해낸 것 같다. 결국 수비를 해내서 시즌을 다 뛸 수 있었다. 아니면 기회를 많이 받지 못했을 것이다”며 데뷔 시즌을 회상했다.
이후 차바위는 강철 체력을 과시했다. 3시즌 동안 전 경기에 출장했다. ’금강불괴‘ 이정현(전주 KCC)을 롤 모델 삼아 전 경기 출전이라는 목표를 잡게 된 계기였다.
기록도 따라야 했다. 평균 출전 시간은 20분 대 초중반을 유지했고, 6점 3리바운드 1어시스트를 유지했다. 수비력으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는 숫자였고, 코칭스태프의 신임이 더해졌던 데뷔 초반이었다.
차바위는 “프로에 와서 몸을 잘 만들었던 것 같다. 운동 능력이 뛰어나지 않지만 몸이 튼튼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다. 그래서 버틴 것 같다. 전 경기에 출전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연이어 차바위는 “(이)정현이형처럼 전 경기 출장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던 때다. 이후 부상으로 인해 끊겼다. 지금까지 가장 아쉬운 부분 중 하나다.”라는 아쉬움을 털어 놓았다.

늘어나는 경력, 아쉬움에 대해서
조금씩 자신의 존재감을 늘려가던 차바위, 그 역시 커리어가 쌓여감에 따라 당연한 기쁨과 아쉬움이 생겨났다.
첫 번째는 아쉬움이었다. 네 번째 시즌이었던 2014-15시즌, 전자랜드는 25승 29패를 기록 하며 정규리그 6위에 올랐다.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한 마지막 순위였다.
상대는 서울 SK. 전자랜드 탈락에 무게가 실렸다. 37승 17패로 3위에 랭크되었던 SK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
결과는 달랐다. 단 한 경기도 내주지 않았다. 당시 SK는 주포였던 애런 헤인즈가 발목 부상으로 결장했다. 그래도 질 것 같지 않았던 당시 분위기였지만, SK는 세 경기를 모두 전자랜드에게 패했다.
기적과도 같은 승리였고, 완전한 상승세를 타게 된 전자랜드였다. 리카르도 포웰이 KBL에 완전히 적응하며 맏형 역할을 해냈고, 토종 선수들이 똘똘 뭉쳐 만들어낸 결과였다.
4강 상대는 원주 동부. 현재의 DB다. 정규리그 2위에 올랐던 팀이다. 전자랜드의 스토리텔링은 1차전에도 계속되었다. 승리를 따냈다. 2,3차전은 내리 패했다.
시리즈 향방이 결정될 수 있는 4차전, 전자랜드 투혼은 다시 빛을 발했다. 승리했다. 79-58 완승 이었다. 시리즈 전적 2승 2패.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분위기를 탄 전자랜드는 5차전도 잡아낼 것 같았다. 하지만 과정과 결과는 달랐다. 한 때 10점 차 리드도 허용했다. 그렇게 막을 내릴 것 같았 다. 뒷심을 발휘했다. 종료 직전 턱밑까지 추격했다. DB는 강했다. 종료 11초를 남겨두고 앤서니 리처드슨이 정중앙에서 3점슛을 터트렸다. 점수는 4점차. 전자랜드의 돌풍은 멈춰서야 했다.
차바위는 그 당시를 아쉬움으로 표현했다. 차바위는 “지금까지 KBL 선수로 가장 아쉬웠던 시즌이 2014-15시즌이었다. 4강 플레이오프에서 DB에게 패했다. 입대 전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 다. 개인적인 결과도 좋았다. 포웰을 필두로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의지도 좋았다. 챔프전에 가는 줄 알았다. 아쉽게 DB에게 졌다. 너무도 아쉬운 시즌이었다”고 전했다.
연이어 그는 “당시 포웰이 1옵션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포웰에게 의존했다. 국내 선수가 흔들어야 했다. 포월 옵션이 너무 잘 맞아서 기댔던 것 같다. 모두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부연 설명을 남겼다.
당시 차바위는 앞선 두 시즌에 비해 기록이 소폭 하락했지만, 수비력에 있어서 한 단계 더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세 시즌을 소화한 차바위는 상무에 입대했다.
또 한 번의 아쉬움이 존재했다. 바로 2018-19 시즌 챔피언 결정전이었다. 상대는 울산 현대모비스. 당시 현대모비스는 1라운드 평균 득점이 100점을 상회했을 정도로 강력한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고, 예상과 다르지 않게 정규리그 1위에 오른 후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전자랜드는 35승 19패로 2위에 올랐다. 전자랜드 역사상 신기성-서장훈-문태종이 존재했던 이후 가장 강력한 라인업이었다.
박찬희-김낙현-차바위가 가드 진에, 강상재와 정효근 그리고 김상규가 포워드진으로 활약했 다. 초반 좋은 활약을 보였던 머피 할로웨이가 부상으로 이탈했던 자리를 찰스 로드가 메웠고, ‘삼산동 귀요미‘라는 애칭을 얻었던 기디 팟츠의 기량도 기대 이상이었다.
결과 역시 다르지 않았다. 시즌 후반 4연패를 당하긴 했지만, 플레이오프를 향한 노림수가 포함된 과정이었다.
4강 플레이오프에서 창원 LG를 만나 3-0 스윕승으로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창단 첫 챔프전 진출과 함께 우승이라는 단어에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당시 극강 전력의 현대모비스를 넘어설 순 없었다. 시리즈 전적 1-4로 패퇴했다. 2차전을 잡아냈지만, 4쿼터 기디 팟츠가 어깨 부상을 당하며 시리즈를 이탈했다. 큰 위기였다. 이후 3경기를 내리 내줬다.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차바위는 “첫 챔프전이었다. 후배들도 잘해줬다. 하지만 (양)동근이형과 지훈이형의 경험을 넘어설 순 없었다. 노련미가 대단했다. 팟츠 부상도 큰 이유로 작용했다. 우승을 키워드로 정말 아쉬운 한 시즌으로 기억된다”고 전했다.
마지막 아쉬움은 지난 시즌 4강. 전주 KCC에게 2-3으로 패했다. 1,2차전에서 완패를 경험했던 전자랜드는 인천 홈으로 이동해 3,4차전을 잡았다. 기적과도 같은 승리였다. 1,2차전 경기력을 봤을 때, 5차전을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전자랜드는 시리즈를 5차전으로 몰고 갔다. ’이길 것 같다‘는 예상이 우세했지만 체력에 발목을 잡히며 인천과 전자랜드의 역사를 마무리해야 했다.
차바위는 “1,2차전을 전주에서 지고 왔다. 3차전이 전자랜드로 마지막이 될 수 있었다. 선수단이 3차전을 앞두고 ‘후회 없이 하자’고 결의했다. 세 번째 경기가 마지막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한 발 더 뛰었다. 두 경기(3,4차전)은 시작부터 압도했다. 5차전은 체력에서 한계를 보았다. 선수들이 모두 그래 보였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3쿼터부터 ‘못 뛰겠다. 못 넘기겠다. 숨이 목에 차오르는 느낌도 들었다.’고 전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도 넘어서지 못했다. 너무도 아쉬운 경기 중 하나다. 이제 가스공사로 옮긴다. 다시 우승의 기회가 온다면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전자랜드를 키워드로 한 대화를 이어갔다.
차바위는 “시즌 시작 때는 와 닿지 않았다. 당장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냥 시즌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경기를 거듭 할수록 성적이 좋아야 우리 팀을 인수할 기업이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이후에는 비장함과 책임감으로 임했다. 성적에 대한 부담감도 없지 않았다. 5차전을 지고 난 후에 팬 분들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죄송스러웠다. 10년 넘은 열성팬들이 많다. 우승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죄송한 마음이 가장 컸다”며 인천 그리고 전자랜드와 이별을 아쉬워했다.

‘아듀’ 전자랜드, 한국가스공사 그리고 대구
전자랜드와 9년간 동거를 끝낸 차바위는 이제 한국가스공사와 동행을 시작했다.
지난 일요일(7월 25일) 오후 전화 통화가 연결된 차바위는 ‘대구에서 머물 집을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다’고 전했다.
가스공사 인수 발표 후 연고지로 유력했던 대구가 7월 말이 돼서야 체육관 보수에 대한 계획을 내놓았다.(9월 20일에 대구실내체육관 개보수를 완료할 계획이다) 유력이 확정이 되는 순간이었고, 차바위는 부랴부랴 기거할 곳을 알아보기 위해 주말 휴가를 이용해 대구를 방문했던 것이다.
차바위는 “먼저 감사했다. 10개 구단이 유지되는 의미도 있다. 회사도 방문을 했다. 많이 반겨 주셨다. 놀랬다. 응원도 해주셨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유 감독님이 창단 첫 주장이라는 임무를 주셨다. 지난 시즌부터 후배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정)영삼이형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후배들을 다독이는 역할을 자주 했다. 그 부분이 좋아보이셨던 것 같다. 저를 믿고 맡겨 주셨다. 부담감이 크다. 그저 해오던 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말보다는 행동과 운동, 토킹 등에서 솔선수범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은 것부터 신경을 쓰겠다. 시즌이 중요하다. 부상 없이 경기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 분위기를 좋게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위에 언급한 대로, 한국가스공사는 대구시에 정착하려고 한다. KBL과 가스공사 협약식 이후 한 달이 훌쩍 지난 시점이다. 선수단은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고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과 마주했다.
차바위는 “인천에서 훈련하고 있었다. 선수들이 훈련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제일 좋다. 인천 팬들에게 아쉬움이다. 대구 팬 분들도 있을 거다. 팬들에게 더 잘하고 싶다. 농구장에 한 분이라도 더 오게 하고 싶다. 팬이 없는 농구단은 없다”며 고참다운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차바위는 데뷔 시즌부터 전자랜드에서 활약한 원 클럽맨이다. 믿음과 신뢰 그리고 실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차바위는 “전자랜드에서 은퇴하고 싶었다. 감독님과 (정)영삼이형 다음으로 가장 오래 있었다. 새로 들어오는 선수들이나 동생들에게 아는 걸 많이 전해주고 싶다. 다른 의미는 없다. 후배들을 챙기겠다. 뿌듯함도 있다. 한국가스공사가 마지막 팀이길 바란다”고 전했다.
20분이 넘었던 전화통화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마지막 키워드는 목표였다.
차바위는 “아직 개인적인 목표는 없다. 올해는 우승을 향해 뛰어 보겠다. 부상 없이 한 시즌을 치러야 팀원들을 챙길 수 있다. 그래야 우승을 할 수 있다. 작년에 상을 탔다. 수비 5걸이다. 상을 탄 것 이상으로 기분이 좋더라. 내 이름이 올라간 것이 뿌듯했다. 보상을 받은 느낌이 강했다. 상을 받고 내려오면서 내년에도 수비상을 탈 수 있도록 주문을 넣었다. 수비상을 받으면 분명히 우승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긴 대화를 마무리했다.
신뢰의 아이콘 차바위. 과연 그는 창단 첫 주장으로서 우승을 일궈낼 수 있을까? 차바위의 행보에 많은 관심이 쏠릴 것 같다.

사진 제공 = K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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