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석양 붉은 덩어리의 마법, 유리에 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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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올해의 공예상’ 받은 김준용 작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선정하는 ‘2021 올해의 공예상’의 주인공은 김준용(49) 유리공예 작가다. 올해 4회째인 이 상은 한국 공예 발전에 기여하고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는 창작자에게 주어진다.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공예디자인학과 교수이기도 한 김 작가는 유리공예 불모지였던 국내에서 20년간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현해왔다. 2018년에는 ‘전 세계 공예작가들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제2회 로에베(LOEWE) 크래프트 프라이즈’ 파이널 30인에 선정됐고, 이듬해에는 작가가 아닌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1만 시간의 법칙
![작품명 ‘어떤 저녁’. 서쪽 하늘에서 번지는 노을빛이 연상된다. [사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김준용]](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109/04/joongangsunday/20210904002107873hcer.jpg)
김 작가가 2018년 ‘로에베 크래프트 프라이즈’에 출품한 ‘석양 속의 눈물(Tears in the Sunset)’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평가다. 언뜻 들으면 모든 유리가 가진 물성에 대한 일반적인 해설처럼 보이지만, 전문가들의 이런 평가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는 ‘블로잉 기법’과 ‘캐스팅 기법’을 함께 사용한다. 현존하는 유리공예 작가 중 두 기법을 동시에 사용해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김 작가가 거의 유일하다. ‘로에베 크래프트 프라이즈’ 심사위원들이 높이 산 부분도 바로 이 대목이다.
블로잉은 유리공예의 대표적인 전통기법이다. 규석과 소다를 녹여 만든 말랑말랑한 유리를 돌돌 말아 1600℃의 뜨거운 용해로에 넣었다가 꺼낸다. 연결된 긴 파이프로 숨을 불어넣고, 코르크·신문·쇠 가위 등으로 표면을 조이고 누르며 형태와 디자인을 잡는다. 그런데 이렇게 만든 유리는 원래의 유리 덩어리가 가진 크기 때문에 일정 정도 이상의 두께를 갖지 못한다. 대부분의 유리잔과 화병이 안은 비어 있고 두께가 얇은 이유다.
![작품명 ‘정령의 풍경’. 위로 갈수록 두께가 얇아지면서 진청색에서 연둣빛을 띤다. [사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109/04/joongangsunday/20210904002109159aanu.jpg)
김 작가가 이처럼 복잡하고 번거롭게 서로 다른 기법을 섞어가면서까지 유리 두께에 천착하는 이유는 색의 자유로운 농담(濃淡) 표현을 위해서다.
“바닷물의 깊이가 얕으면 물이 에메랄드빛으로 보이지만, 심해는 진청색을 띄잖아요. 유리도 두꺼울수록 진하고, 얇을수록 옅은 색을 띄죠. 그 오묘한 농담을 자유자재로 표현하기 위해 저는 블로잉 기법과 캐스팅 기법을 병행하는 겁니다.”
색유리도 직접 만든다. 유리 원료에 금가루를 섞으면 보라색, 은가루를 넣으면 노란색, 산화철을 녹이면 녹색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만든 색유리를 어떤 부분은 두껍게, 어떤 부분은 얇게 펼치고 깎아 북극의 오로라처럼 신묘한 컬러 그러데이션을 만드는 게 김 작가만의 기법이다.
![작품명 ‘저녁 7시30분 청주’. 블로잉 기법과 캐스팅 기법을 병행하는 김 작가의 작품들은 유리지만 표면 질감이 다양하다. [사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109/04/joongangsunday/20210904002110432rfys.jpg)
‘1만 시간의 법칙’은 미국의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이 1993년 발표한 논문에서 주장한 개념이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 이상의 훈련이 필요 하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일 거예요. TV 프로그램 ‘뽀뽀뽀’에서 유리공장 영상을 봤어요. 두꺼운 철문을 여니까 칠흑처럼 까만 통 한가운데서 빨갛기도 하고 주황색 같기도 한 불덩어리가 출렁거리는데, 정말 놀랍도록 아름다운 광경이었어요.”
유리로 쓰는 수필
![김준용 작가. [사진 김준용]](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109/04/joongangsunday/20210904002111732upxw.jpg)
그가 지금까지 손끝으로 체득한 기법과 기술은 점점 더 넓고 섬세해졌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석양’이라는 테마는 한결같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출렁이는 붉은 덩어리’를 만들려는 욕망은 대학 시절 지리산 여행에서 만난 석양을 통해 더욱 구체화됐다.

“작품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유리로 쓰는 수필이라는 생각을 해요. 유리를 통과한 빛을 통해 내가 경험한 어느 순간을 관객들과 공유하는 거죠. 저는 호주 아들레이드 해변의 석양을 상상하며 작품을 만들었지만, 관람객의 머릿속엔 저마다의 석양의 추억이 펼쳐지겠죠.”

그는 후배 작가들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해외 공모전은 많이 시도할수록 좋아요. 공모전마다 성격과 목적이 다 다르거든요. 자신의 작품과 맞는 궁합이 따로 있다는 얘기죠. 서양의 공예 전문가들과 이야기해 보면 한국은 영국·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공예 강국으로 이미 자리 잡았어요. 그러니 자신감을 갖고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을 준비해 문을 힘차게 두드려 보세요.”
서정민 기자/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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