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익의 진화]왜 접종받고자 하는가?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2021. 8. 3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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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양자전기역학에 대한 공헌으로 노벨 물리학상(1965년)을 받은 리처드 파인먼이 언젠가 시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우리 시인들은 꽃을 보고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시를 쓰기도 하죠. 과학은 이 꽃을 분석할 수는 있겠지만 이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는 없어요. 과학은 인문이 주는 인생의 가치, 실존, 의미에 대해 침묵합니다.” 촌철살인의 과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우리 과학자들도 이 꽃에서 시인 여러분이 느끼는 아름다움을 비슷하게 느낍니다. 정말 아름답죠.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 경험입니다. 그런데 과학은 여기서 무언가를 더 봅니다. 가령 꽃잎이 난 위치와 순서에 주목하는 과학자는 거기서 피보나치수열을 찾아내곤 하죠. 하하.”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이것은 과학이 제공하는 ‘플러스알파’ 효과다. 과학자는 자연계 속에 숨어 있는 원리와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그 심층의 아름다움까지 통찰할 수 있다. 그들은 이 통찰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전달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1859년 11월24일만큼 과학의 이 ‘플러스알파’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날은 없을 것이다. 그날은 영국의 과학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 초판 1250부를 출간한 날이다. 이날을 기점으로 인류는 생명의 세계에 대한 문맹의 시대를 벗어났다. <종의 기원> 이전까지 인류는 생명세계의 다양성과 정교함을 그저 인문적 시각으로만 감탄하고 있었다. “아, 아름답다. 기가 막히다. 신의 솜씨가 놀랍다.” 이런 식이었다.

마치 한글을 못 읽는 외국인이 이 칼럼의 글자체만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그는 글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다윈 이전에 인류가 그랬다. 생명의 세계에 새겨진 글자를 읽지 못하니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다윈은 자연선택 메커니즘과 생명의 나무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이 변화무쌍한 생명의 세계를 처음으로 해독했다.

이제 다윈의 후예인 우리는 생명의 세계를 감탄의 표정으로만 대하지 않는다. 자연계를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한국어를 읽기 시작한 외국인에게 서울이라는 도시는 엄청난 즐거움일 것이다. 이런 것이 과학이 우리 인생에 선사하는 풍요로움이다. 우리는 운 좋게도 다윈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진화의 관점에서 자연계를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왓슨과 크릭 이후의 세대이기 때문에 뉴스에서조차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분자적 구조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 반면 이것을 배우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계에 대해 까막눈인 셈이다.

‘플러스알파’ 효과는 사실의 영역을 넘어 의미와 가치 형성에도 큰 기여를 한다. 사실만으로부터 가치를 이끌어내는 것은 논리적 오류이다. 가령 모두가 편견을 갖고 있다고 해서 편견을 가진 삶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삶의 가치와 의미들이 수많은 사실들에 근거해 있다는 점이다. 타인을 고문하는 행위가 나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고문이 사람을 고통에 빠뜨리고(사실 진술),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는 나쁘기 때문(가치 진술)이다. 즉 고문 행위가 나쁘다는 단순한 명제조차도 인간에 대한 사실(위의 사실 진술)에 의존해 있다. 하물며 삶과 연관된 수많은 가치들이 순전히 가치 진술의 집합만으로 생성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과학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 자연, 우주에 대한 사실들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하고 있다. 중세 시대의 보통 사람들이 추구했던 삶의 가치가 요즘 사람들의 것과 다른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받아들였던 ‘사실 집합’과 지금 우리의 ‘사실 집합’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루한 가치를 품고 사는 분들에게 시급한 것은 새로운 가치의 수용이 아니다. 그동안 업데이트된 새로운 사실에 대한 존중이다.

미국인의 20% 이상은 정부의 강제에도 불구하고 백신을 맞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백신이 발명되기 전의 세계에 살고 있는 분들이다. 반면 한국인의 대부분은 빨리 접종을 하고 싶어한다. 다행스럽긴 하지만 걱정도 된다. 왜냐하면 과학에 대한 존중이 아닌, 주변 사람들이 앞다퉈 맞으니까 자신도 빨리 맞겠다고 하는 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 수업에서 배우고 시험까지 봐도 진화론을 거부하는 국민이 30%인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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