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편지는 어떻게든 흘러 어디로든 가닿는다

한겨레 2021. 8. 28.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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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한겨레S]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37. 한 문장의 편지
서로 배설의 언어가 아니라
마음의 편지를 주고받을 때
시끌벅적한 익명의 시대에
우리의 고독은 위로받는다
2018년 4월 한국 퀴어문학을 연구하시던 샘 페리 교수님 초청으로 브라운대학교에 방문했을 때 유학생 한 분에게 받은 편지와 선물. 김비 제공

맨 처음, 편지지 위에 엎드려 펜을 잡았던 기억은 십대 중반이다. 누군가의 얼굴을 생각하며, 그 사람의 얼굴만큼 내 얼굴도 행복해져 나는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줄이 비뚤어지거나 글자가 틀리면, 이걸 대충 수정해 보낼까 처음부터 다시 쓸까 한참을 머뭇거렸다. 편지란 결국 내용을 전달하는 목적이니 틀린 글자에 줄을 긋거나 오르내리는 글줄을 견디고서 부치면 그만이지만, 끝내 다시 쓰는 쪽을 택하고 만다. 내 마음이 글자 안에만 담기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온통 남자아이들뿐인 교실에 그 한 사람에게 편지를 쓰면서, 나는 내 마음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그에게 가닿고 싶었고, 기적 같은 희박함이라도 믿고 싶었다. 사랑의 끄트머리라도, 그림자라도, 부스러기라도, 스쳐 지나간 공허라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보낸 편지 덕분에 우린 친구로 조금 가까워지긴 했지만, 당연히 그의 응답이 사랑은 아니었다. 아무리 온 마음을 적고 간절함을 더해도, 가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단 걸 그때 알게 되었다.

처음 누나라 부른 이의 편지

또 하나의 지워지지 않는 편지는, 보낸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었다. 편지를 쓴 사람은 대학 시절 자취방에서 나와 같이 살던 후배의 친구였다. 같이 살던 후배도 아니고 후배의 친구라니 멀어도 너무 멀지만, 살다 보니 어떤 편지는 어떻게든 흘러 어디로든 가닿기도 하고, 불현듯 나에게 되돌아오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는 나를 처음으로 ‘누나’라고 부른 사람이다. 룸메이트였던 남자 후배에게는 내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나는 먹고살기 위해 남자로 보이려고 애를 쓰던 중이었으니 누가 봐도 남자였을 텐데, 그 친구는 그런 나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누나’라고 불러주었다. 때로는 그 친구 말고 곁에 있는 모두가 당혹스러워했는데, 그는 자신에게는 ‘누나’니까 누나라고 부른다는 식이었다.

누구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내 존재를, 그 이름을 불러준 것 같아 나는 참 고마웠다. 그는 특별한 눈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러니 나에게는 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군입대를 앞두고서 편지를 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아마도 담담하게 그러라고, 답장하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편지가 왔고, 나도 첫 답장을 보냈고, 훈련소에 있는 누구에게라도 적었을 만한 평범한 편지였다. 그리고 그가 훈련소를 퇴소하며 자대 배치 직전에 나에게 답장을 보냈는데, 그 편지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는 훈련소 퇴소식을 하던 날 컴컴해지던 하늘에 관해 적었고, 비에 관해 적었다. 퇴소식을 위해 집결하는데 다시 또 비에 관해 적었고, 동기들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에도 비에 관해 적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의 모습을 비로소 보게 되었던 순간에도, 가족들 이야기 대신 쏟아지기 시작한 비에 관해 적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얼굴에 흐르던 특별한 비에 관해서 적으며, 긴 편지를 마무리했다.

자대 배치를 받고 나면 다시 또 편지를 보내겠다고 적었지만, 그 후로 편지는 오지 않았다. 그가 유독 힘든 자대에 배치되는 바람에 고생 중이라는 이야기를 넘겨들었고, 내 편지는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이 될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때 그가 편지 위에 적은 빗소리와 빗방울과 빗물에 관한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지 다짐만 하고서, 삼십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 고마움을 적는다. 이토록 까마득히 늦은 편지도 그에게 가닿을까? 어딘가에 글을 남긴다는 것, 몇개의 글자 위에 마음을 싣는다는 건 그래서 힘이 세기 마련일까? 우린 이미 늙었고, 우리의 문장들은 낡았지만, 그때 그 설렘만큼은 ‘올드’해지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적어 내려가는 이 글자 위에 생생하다.

이탈리아 여행 때 머물렀던 숙소의 주인분이 우리 부부에게 남겨준 편지. 김비 제공

‘성소수자’ 지우고 공유한 글

언젠가 신문에 실린 내 부족한 글을, 어느 독자분이 공유한 웹 페이지를 본 기억이 있다. 같이 읽자고 청해주시기까지 하니 그 마음이 너무 감사해 나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었는데, 공유한 내 글의 가운데가 어쩐지 헐렁했다. 물론 마음에 와닿는 문장이 각자 다르니 그럴 수 있지만, 이분의 공유 글에는 ‘성소수자’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만 교묘히 빠졌다. 발행되거나 출간된 글은 이미 독자의 것이고, 독자가 그 문장을 어떻게 가지고 놀든 이미 저자의 손에서 떠난 건 당연한데, 나는 의도적으로 ‘성소수자’라는 글자가 삭제된 글 앞에서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아주 어린 아이들과 같이 읽어야 하는 계정일까? 아니 어린아이들이 읽는 글이라도, 성소수자가 어때서?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고, 소수이긴 하지만 그 사이에 다양한 성별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해주는 일이 어때서?

나는 그분이 공유한 의도를 오독하지 않으려고, 꽤 오래 머뭇거렸다. 머뭇거림이라고 간단히 적지만, 나 역시 그분을 함부로 단정 짓고 돌아서는 누를 범하지 않기 위해 내 글 너머에서 그 문장들을 지웠을 그 마음을 생각했다. ‘소수자’라는 말 앞에 ‘성’이란 글자가 불편했을까, 내 연배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평생토록 몸에 새겨진 그 불편함을 쉽게 지울 수 없을 테니,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문장들을 지웠을까?

지워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의 마음은 고립보다 더 깊은 곳에 갇히고 만다. 성소수자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누구의 삶이든 마찬가지다. 오천만의 이야기가 모두 적힐 수 없겠지만, 얄팍한 보편을 생각하는 내 마음이 누군가의 생존을 지우고 있음을 감각할 때, 점 하나, 글자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던 우리는 비로소 동등한 존재로 만날 수 있는 게 아닐까? 당신과 내가 서로를 향한 배설의 언어가 아니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글쓴이’가 되었을 때, 누구든 그런 마음으로 글자를 적을 때, 이토록 시끌벅적한 익명의 시대에 우리의 고독은 위로받게 되는 건 아닌지.

오늘도 나는 당신이 보낸 한 문장의 편지를 읽는다. 몇몇 글은 차마 읽기 힘들지만, 또 다른 글 속에서 내 쪽으로 손을 뻗는 문장들을 만난다.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 내가 적는 이 글은 당신의 귀한 마음에 대한 답장이다. 어디에 있든 당신이 누구든 지금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안부인사다.

김비. 소설가.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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