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어린이의 눈물을 닦아준 한국의 '무술 교육'
네덜란드에 태권도장이 처음 생긴 것은 1967년, 합기도는 1983년
무술 수련에 힘쓰는 태권도와 합기도 도장들
한국 무술을 통해 존중을 배우고 학교폭력 극복에 노력
네덜란드에 처음 태권도가 소개된 것은 1966년이었다. 1965년 서독에 방문한 박종수 사범이 1966년 네덜란드에 방문해 태권도 시범을 보였다. 이후 그는 1967년에 네덜란드 태권도연맹을 만들고 TV에 출연하는 등 태권도 알리기에 힘썼다.
현재 국제태권도연맹(ITF)에 소속된 네덜란드의 태권도장은 32개이고, 네덜란드 태권도연맹에 가입된 도장은 188개에 이른다.
한국의 다른 무예인 합기도도 네덜란드에서 역사가 깊다.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 지역에 있는 아이젤스테인(Ijsselstein)의 합기도 도장은 1983년에 세워졌다.
합기도는 명재남 씨를 중심으로 계승됐는데, 그 과정에 합기도 무예가인 고백용 씨도 참여했다. 고백용 씨는 1993년 위르크 합기도장을 방문해 '정무관'이라는 이름을 지어줬고 정무관은 한기도를 보급하는 유럽의 주요 도장이 됐다. 네덜란드에는 총 10개의 합기도 도장이 있다.
필자는 네덜란드인들이 한국에서 시작된 무술을 배우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기도를 가르치는 정무관에 방문했다. 정무관에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캠프가 열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숲속에 자리 잡은 정무관 ⓒ김정기
체육관 내부는 한국의 체육관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의무적으로 구비해야 하는 응급처치실과 쾌적해 보이는 남녀 탈의실 및 샤워실이 잘 준비돼 있었다. 체육관은 숲속에 둘러 쌓여 있어 도장은 마치 숲속 펜션과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체육관 안 곳곳에는 한국어가 쓰여 있었다.
오전 11시에 방문한 체육관에는 14명의 학생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수련하고 있었다. 초등학생인 아이들은 사뭇 진지한 자세로 훈련에 임했다.
◆부모들은 사회적 관계 향상을 위해 자녀들을 도장에 보낸다고 말했다. ⓒ김정기
수련이 한창일 때, 수련생인 요엘 학생을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와 짧은 인터뷰를 가졌다. 요엘의 어머니 머라이크 씨는 한기도가 한국 무술인 것을 몰랐다.
“요엘이 수련하는 한기도가 한국 무술인지는 몰랐어요. 소셜미디어서비스(SNS)와 지역 신문을 통해서 이 도장을 알게 됐어요. 지난 4월부터 아이를 이곳에 보냈어요. 아이를 친구들과 만나게 하고 싶었고 ‘존중’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었어요. 물론 운동을 시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요. 아이가 아주 즐거워해서 만족해하고 있어요. 어린 셋째도 이 도장에 보낼 생각이 있어요.”
짧은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수련장으로 돌아왔다. 정무관의 클라스 바런츠 관장은 학생 한 명과 함께 시범 동작을 보여주고 이후 다른 학생들이 조를 나눠 이 동작을 연습하게 했다.
어린 학생들은 장난기 어린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각종 동작 수련을 마치고, 팔꿈치를 바닥에 붙이고 허리를 곧게 펴는 플랭크 대회를 마지막으로 훈련은 마무리됐다.
훈련을 마친 일부 학생들에게 한기도 수련에 대해 물어볼 수 있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요엘 파커 학생의 ‘존중’에 대한 이야기와 루시안 크란 학생의 학교폭력을 극복한 이야기였다.
◆아이들은 무술을 통해 네덜란드식의 존중을 배우고 있었다. ⓒ김정기
2년 5개월간 한기도를 수련한 요엘 학생은 운동능력을 기르기 위해 한기도를 수련 중이라고 밝혔다. 한기도에서 배운 것은 특이하게도 ‘존중’이라고 말했다.
요엘 학생은 “제 의견을 잘 고수하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요. 훈련 파트너가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인내하며 존중하는 연습을 할 수 있어요”라고 이야기했다.
◆정무관에서 수련에 힘을 쏟고 있는 네덜란드 학생 ⓒ김정기
루시안 크란 학생의 이야기는 가슴을 울렸다. 루시안 크란 학생은 오랜 시간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다고 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스스로를 방어하고자 한기도 도장에 등록하게 됐고 지금은 괴롭힘에서 벗어나 잘 지내고 있다고 밝혔다.
◆체육관 곳곳에 한글이 눈에 띈다. 사진 가운데가 바런트 관장 ⓒ김정기
이에 대해 관장인 바런트 씨는 두 학생의 이야기 안에 숨겨져 있는 깊은 뜻을 설명해줬다.
“네덜란드의 존중과 한국의 존중은 그 개념이 다릅니다. 한국의 존중은 예의범절과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네덜란드의 존중은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가지면서,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도 잘 지낼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한국의 존중을 네덜란드에 그대로 가져오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필요한 존중을 한기도를 통해 가르치고자 합니다.”
네덜란드인들은 나의 생각을 꺾지 않고도 다른 생각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을 ‘존중’이라고 이해한다. 다른 사람과 피부를 맞대며 수련해야 하는 무술 수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존중’을 배워나가는 것이다.
네덜란드와 같이 청소년 행복도가 높은 나라에서 학교폭력이 일어나는 것이 의아해 바런트 관장에게 학교폭력의 원인과 해결 방법에 대해 물었다.
“학교폭력이 없는 나라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학교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존감의 부족입니다. 폭력의 가해자는 자신의 부족한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피해자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것이 하나의 피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학급에서 괴롭힘 사건이 일어나면 학교의 의뢰로 그 학급 전체가 도장에 와서 교육을 받거나 피해자 학생이 혼자 도장에 와서 교육을 받기도 한다. 이들이 받는 교육은 싸움의 기술이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를 배우고 개선해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교육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새로운 동작들을 배우다 보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인 정서가 자라난다고 바런트 관장은 설명했다. 이런 자신감이 생긴 아이들은 학교폭력에 무기력하게 무너지지 않게 되고, 또는 학교폭력을 행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우리 체육관에는 15명의 사범과 보조 사범이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 ‘교육’ 자체에 대한 논의를 많이 하는데 교육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범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요. 우리는 싸움을 가르치지 않아요. 우리는 행동과 매너, 삶의 교훈을 가르칩니다. 우리 사범단은 학생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한기도를 가르치고 있어요.”
정무관에 소속된 훈련생은 총 330명 가량 된다. 이 도장은 비영리단체로 시에 등록돼 있으며 한 달 회비는 약 2만 7천 원에 불과하다. 사범단은 파트타임 직업을 따로 갖고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관장인 바런트 씨도 주중 4일은 인근지역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3일간 정무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이런 독특한 운영이 가능한 이유는 지역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가능했다.
“우리는 위르크 지역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30여 년간 이 지역에서 합기도와 한기도를 가르쳐왔어요. 이 지역사회에서 무술을 보급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위르크 지역에서 합기도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우리는 많은 회비를 받지는 않지만 돈을 쫓지 않아요. 성인들에게는 높은 수준의 무술을 보급하고자 하고, 학생들은 바른 정신을 가지고 자라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인구가 채 2만 명도 되지 않는 위르크 지역이지만 한국 무술은 지역사회의 청소년들을 위해 중요한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급속도로 발전해온 한국 무술은, 6,000km 떨어진 곳에서 학교폭력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청소년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좋은 친구가 되고 있다.
네덜란드 캄펜 = 김정기 글로벌 리포터 kjgwow@gmail.com
■ 필자 소개
네덜란드 캄펜 신학대학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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