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 발언대]이 나라가 너무 부끄럽다

남웅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 2021. 8. 2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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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년 전 A가 사무실을 찾아왔다. 성소수자임이 밝혀져 본국을 떠났고, 체류국을 선택할 겨를 없이 한국에 당도해 난민신청을 했다. 난민불인정 판결에 불복 중인 그는 자기와 같은 성소수자를 만나고 싶어 했다.

남웅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

본국 사람들은 한 지역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제3세계 비서구 국가에서 온 이들이 살아가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A는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성소수자를 처벌하는 본국 상황을 고려하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었다. 그와는 늦은 밤 통화했고, 머무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만 만났다.

영어가 짧은 우리는 번역 애플리케이션에 의존했다. 문자언어를 읽지 못해 음성번역에 이모지를 동원했다. 끊기는 대화에도 절박함만은 선명했다. 공장의 격무로 몸살에 시달리던 그는 약국만 갈 뿐 병원은 어려워했다. 밤늦게 만나 비타민과 HIV검진키트를 쥐여주며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하라는 인사를 전하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그런 중에도 헤어질 때면 그는 한 번씩 포옹을 해줬다.

최종재판마저 고꾸라지고 체류를 수차례 연장하는 동안 그는 외국인 아이디를 뺏기고 수시로 휴대폰 번호를 바꿨다. A와 연락하는 건 쉽지 않았다. 번호를 따로 저장하지 않아 아쉬웠지만 사정을 고려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코로나19 이후에는 연락이 더 뜸해졌다. 어쩌다 통화가 되면 누구랄 것 없이 ‘Miss you’를 연발했지만 감정보다 중요한 건 생계와 안전이었다. 새벽에 걸려온 마지막 통화에 A는 간간이 하던 일마저 끊겼다고 전했다. 그 와중에 틈틈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으니 다음에는 한국어로 대화하자는 실없는 농담을 나눴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났고 연락은 닿지 않는다.

여느 난민처럼 경계할 것이 많았던 A는 필요한 것도 많았다. 생존을 위해 돈이 절실했고 편히 누울 자리가 필요했다. 조력하는 변호사가 있고 주거와 자원을 지원하는 본국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지만, 그는 외로움을 토로할 동료와 소통할 언어를 원했다. 무엇보다 필요한 건 기약 없는 출국기한 연장이 아니라 성소수자로서의 난민인정이었다. 하지만 활동가로서 그에게 제공할 도움은 많지 않았다. 도움은커녕 부지불식간에 연락이 끊겨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무능을 자책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나 역시 연락을 하지 않는다.

최근 예멘 난민을 조력했던 활동가를 만나 속절없는 마음을 토로했다. 그는 제주도에 발이 묶인 이들이 출도가 허락되자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 아픈 기억을 말한다. 수개월간 집과 밥을 내주던 주민들은 적잖게 실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저 사람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전시상황 아니었을까요.” 타국의 일상마저 전장이라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당신들의 무사안녕을 빌기에는 이 나라가 너무 부끄럽다.

남웅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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