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쟁 책임 묻는 지식인이자 반전 민주주의 활동가였죠"

한겨레 2021. 8. 2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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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도미야마 다에코 작가를 추모하며

자신의 판화 작품 앞에 앉아있는 말년의 도미야마 다에코.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라이브러리스

‘돌아가실 때까지 날카로운 할머니’였던 도미야마 다에코 선생이 지난 18일 오후 3시 일본 도쿄의 자택에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임종을 지켰던 손녀로부터 전해 들었다. 1921년 11월6일에 태어난 그가 만 100살을 석달 앞두고 ‘기억의 바다’로 떠난 것이다.

코로나19 감염 사태로 1년을 연기한 끝에 지난 3월부터 연세대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회고전 ‘기억의 바다로: 도미야마 다에코의 세계’의 전시 도록에서 도미야마는 한국과의 만남을 ‘구원’이라고 했을 만큼 생전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은 작가였다. 그는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는 지식인이자 반전과 민주주의를 위한 활동가였으며 페미니스트였다. 나는 선생을 작품이 아니라 그의 저서 <해방의 미학>을 통해 먼저 알게 되었다. 민주화의 열망이 불길처럼 타오르던 1980년대 이 책은 미술의 사회적 실천에 대해 고민하던 나에게 샘물과 같은 것이었다.

도미야마 다에코가 한국과 아시아를 인식한 것은 1930년대였다. 만주 지역으로 전근한 아버지를 따라 중국 다롄과 하얼빈에서 여학교를 다닌 그는 일본에 의해 희생당한 중국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식민지배자라는 것을 깨닫고 아시아에 대해 자각했다. 여학교에서 한글 이름을 쓰고 한복을 입은 친구를 만나면서 조선인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진학을 위해 한반도를 경유해 일본으로 돌아가는 기차의 차창을 통해 조선 청년이 일본 헌병한테 구타당하는 모습과 황폐한 토지를 보고 식민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발견했다.

일본이 패전한 뒤 탄광을 취재하던 그는 1960년대 탄광이 폐쇄되자 일자리를 찾아 남미로 떠난 탄광 노동자들을 찾아갔다. 이 과정에서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쿠데타와 군사독재의 실상을 접한 그는 1970년 한국 방문을 계기로 한국의 군사독재 체제에서 탄압받는 예술가도 알게 되었다.

만주 학창 시절 ‘식민지배 현실’ 눈떠
60년대 남미 찾아 일 탄광노동자 취재
70년 방한 계기 한국민주화 운동 연대
박정희 정권에서 입국 거부 당하기도
‘5월 광주’에 분노·감동 느껴 판화 연작

“고인 뜻 저항의 지속으로 계속될 것”

과거 하얼빈에서 사귄 친구를 찾아 서울을 방문했던 도미야마는 서울역전과 동대문시장에서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고 있는 한국 여성의 모습을 연필과 수채로 담았다. 이 스케치는 1971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사건’으로 투옥 중이던 서승을 면회하러 갈 때 그린 ‘서대문형무소 면회를 기다리는 어머니’와 함께 훗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되었다. 민주화운동으로 투옥된 시인 김지하 등을 통해 전쟁과 분단, 독재체제가 식민주의의 유산임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을 새롭게 발견했다. 김지하의 시를 모티브로 출판한 시화집과 슬라이드를 제작했다는 이유로 한국 정부로부터 입국을 거부당했던 도미야마가 다시 한국과 만난 것은 1980년 광주의 5월이었다.

뉴스에서 ‘5월 광주’의 소식을 듣고 작가는 한국의 민중이 드디어 일어났다는 감동과 함께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으로 시민들이 희생된 사실에 경악과 분노를 느꼈다. 이런 감정들 속에서 5·18을 주제로 ‘쓰러진 자를 위한 기도’ 판화 연작을 제작했다.

도미야마의 작품은 광복 50주년이었던 1995년 그에 대한 글을 썼던 미술평론가 윤범모의 기획으로 동아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종군위안부를 위한 진혼곡’을 통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같은 해 열린 제1회 광주비엔날레의 ‘광주 5월 정신’ 전과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의 ‘예술과 인권’ 전에서도 광주를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했다. 작가에게 광주의 5월은 분단과 전쟁, 군사반란과 독재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과 모순을 압축한 대일본제국의 잔재이기도 했다. 이로써 광주는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는 위안부와 함께 일본의 식민지배가 남긴 유산을 고발하는 주제가 되었다. 1995년 동아갤러리 개인전에 이어 지금 연세대 박물관에서 연장 전시 중인 ‘기억의 바다로’ 전은 행동하는 예술가 도미야마의 생애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시다. 두 전시에서 한국과의 각별한 인연을 알 수 있다. 영어의 몸에서 풀려나 프랑스 파리로 돌아간 작가 이응노, 박인경 부부한테서 좋은 품질의 붓과 종이, 먹 등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받고 도쿄의 화방에서 그것을 구해 보내줄 만큼 한국 작가와의 인연도 각별했다. 그는 올해 34년을 맞은 6·10항쟁 기념식에서 민주주의 발전의 유공을 인정받아 국민포장을 받았다.

남태평양 바다에 가라앉은 위안부의 자취를 찾아 아시아 곳곳을 다녔던 선생은 이제 그 기억의 바다로 떠났다. 비록 그는 떠났지만 위안부 문제부터 광주의 오월, 동일본대지진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전쟁 책임과 한국의 민주화운동, 전 지구적 재앙에 대해 발언했던 고인의 뜻은 남은 사람들에게 저항의 지속으로 계승될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최태만 국민대 예술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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