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문호가 메달 없이 도쿄에서 돌아온 진짜 이유
● 적었던 선발 자원에도 대책 준비 않아
● 위기에도 최고 투수 아끼다 패배
● 부족한 2루수, 사이드암 충원도 소홀
● 과거 전략 고집한 金 감독의 패착
2020 도쿄(東京) 올림픽 경기를 지켜보면서 은희경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2010)에 나오는 이 문장을 자주 떠올렸습니다. 특히 야구 경기를 볼 때마다 이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던 인터넷 유행어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베이스볼 비키니' 제목은 "한국 대표팀이여, '삿포로 참사'를 기억하라!"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국 대표팀은 '요코하마(橫浜) 참사'를 기억해야 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혹시 김경문(63) 한국 야구 대표팀 감독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2008 베이징(北京) 대회 이후 세상이 많이 달라졌으니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걸 인정하지 못한 건 아닐까요?
선발 야구 집착하다 놓친 기회
김 감독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도미니카공화국에 6-10으로 패한 뒤 "(대회 전) 선발 투수들을 걱정하고 왔는데 오늘도 생각보다 빨리 교체가 이뤄져 투수들을 급하게 운영했다"면서 "결국엔 한국 야구가 다음 국제대회에서 우승하려면 좋은 선발 투수를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말했습니다.이 발언을 접하고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에 교육 담당 기자 자격으로 핀란드에 출장 갔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핀란드에서 만난 선생님 한 분은 "학생 모두가 가정교육을 잘 받고, 지적 능력도 뛰어나다면 교사 일이 훨씬 쉬울 거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교사 일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네, 선발 투수가 긴 이닝을 실점 없이 막아준다면 감독 일이 훨씬 쉬울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감독 일이 훨씬 중요합니다. 대회 시작 전부터 선발 투수가 걱정이었는데 왜 선발이 긴 이닝을 책임질 거라고 기대하면서 마운드 운용을 해야 하나요?
2018년 메이저리그 야구팀 템파베이 레이스는 '오프너' 투수를 기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프너 투수는 5~7이닝을 책임지는 선발 투수 대신 1~2회를 막아줄 불펜급 투수를 말합니다. 뒤이어 긴 이닝을 던질 수 있는 투수를 기용해 3~6 이닝을 버티고, 이후 중간계투와 마무리 투수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투수를 운용합니다. 이 방식을 사용해 템파베이 레이스는 2018년 3명의 선발 투수 자원만 가지고도 50% 이상의 승률을 유지했습니다.
게다가 한국이 제일 고비였던 승자 준결승에서 일본에 패한 건 선발이 못 던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야구팬 모두 오승환(39·삼성 라이온즈)이라는 세 글자를 떠올리고 있을 때 1루 커버 실패 이후 심리적으로 흔들리고 있던 고우석(23·LG 트윈스)을 계속 마운드에 내버려 뒀기 때문입니다.
팀에 남아 있는 제일 좋은 투수를 위기 상황에 바로 바로 마운드에 올려야 한다는 건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미 상식이 된 지 오래입니다. 이렇게 구원 투수가 '귀한 몸'이 됐기에 야수가 마운드에 오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된 겁니다. 대표팀에도 좋은 선발이 필요한 만큼 좋은 구원 투수가 많이 필요합니다. 단기전이야말로 당장 눈앞에 있는 위기를 하나씩 해치우지 못하면 다음 기회를 얻지 못하니까요.
오늘 없이는 내일도 없다
김 감독은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2007년 한국시리즈 때도 비슷한 선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SK 와이번스에 2승 3패로 뒤진 채 맞이한 6차전에서 두산이 1회 초에 선취점을 뽑으면서 앞서가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인 에이스 투수인 다니엘 리오스(49)를 올리면 경기를 이길 수도 있던 상황. 김 감독은 리오스 카드를 아꼈고 결국 2-5로 역전패하면서 SK에 우승 트로피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 김 감독은 "리오스를 투입하면 오늘 경기는 이길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오늘 리오스 없이 이겨야 내일 승산이 있다고 봤다"고 답했습니다.
‘내일'은 2007년에도 2021년에도 오지 않았습니다. 2007 한국시리즈는 6차전에서 그대로 끝이 났고, 2021년 패자 준결승전 때도 2-7로 미국에 끌려가던 8회 말 2사가 돼서야 오승환은 마운드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내일'을 생각했다면 이미 승부가 기운 상황에서 오승환을 마운드에 올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쫓기다 보니 도미니카공화국을 상대로는 오승환에게 2이닝 세이브를 맡기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고 결과는 3분의 1이닝 5실점이었습니다.
발탁 원칙 저버린 것도 문제
2003년 삿포로 참사와 이번 요코하마 참사는 모두 감독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투수가 '방화범'이 됐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2003년에는 김재박 감독이 심수창(40·당시 한양대)이 못 미덥다며 뽑은 조웅천(50·당시 SK)이 대만전 패전 투수가 됐고, 이번에는 김경문호(號)에 맨 마지막으로 합류한 오승환이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다른 점도 있습니다. 김재박 감독이 대회 시작 나흘 전 조웅천을 발탁한 건 스스로 책임져야 할 일이지만 박민우(28·NC 다이노스), 한현희(28·키움 히어로즈)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방역 수칙 위반으로 태극마크를 반납하게 된 건 김경문 감독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 대표팀에서 스스로 정한 대체 선수 선발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건 문제가 됩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기술위원회는 6월 16일 도쿄 올림픽 야구 대표팀 엔트리를 발표하면서 "현재 선수를 대체할 선수들도 미리 정해 놓았다"면서 "왼손 투수가 빠지면 그다음 왼손 투수가 올라올 것이고 사이드암 투수라면 그다음으로 잘 던지는 사이드암 투수를 뽑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박민우는 대표팀 주전 2루수 자리를 맡을 선수였고, 한현희는 사이드암 필승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둘이 빠진 자리를 2루수 자원과 사이드암 투수로 채우는 게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구팬 대부분이 2루수는 정은원(21·한화 이글스), 사이드암 투수로는 강재민(24·한화 이글스)이 대표팀에 합류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 김경문호에 합류한 건 왼손 투수 김진욱(19·롯데 자이언츠)과 오른손 정통파 오승환이었습니다.
이 원칙이 무너진 탓에 한국은 한일전 선발 2루수로 황재균(34·KT wiz)을 내보내야 했습니다. 원래 3루수가 주 포지션인 황재균은 프로 데뷔 이후 한 번도 2루수 수비를 본 적이 없는 선수입니다. 수비만 문제가 됐던 게 아닙니다. 황재균을 선발 2루수로 내보낸다는 건 대타·대수비 카드를 한 장씩 포기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황재균은 이날 타석에서도 3타수 무안타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달라진 새 야구에 적응 실패
투수 쪽에서도 사이드암 중간 계투가 빠진 자리를 붙박이 마무리로 채워 넣으면서 오른손 선발 자원인 원태인(21·삼성 라이온즈)을 경기 중반에 내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특히 미국에 1-2로 끌려가던 패자 준결승 6회 말 1사 1루 상황에서 원태인을 마운드에 올려야 했던 게 뼈아팠습니다.당시 미국의 타선은 오른손 타자 제이미 웨스트브룩(26) - 마크 콜로스베리(26) - 닉 앨런(23)이 이어지는 상황이었으니까 오른손 투수가 필요했던 건 맞습니다. 김 감독에게 오승환은 역전 이후에 경기를 마무리해야 하는 투수니까 패스. (혹시 신경을 썼다면) 이미 3경기 연속 공을 던진 조상우(27·키움 히어로즈)를 뒤진 상황에서 쓰기도 애매했을 겁니다. 그러니 이미 전날에도 구원 등판 경험이 있는 원태인을 마운드에 올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태인은 이 세 타자를 상대로 아웃 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한 채 안타 - 안타 - 볼넷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참고로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한 사이드암 투수 강재민은 이번 시즌 오른손 타자를 OPS(출루율+장타력) 0.497로 막았습니다. 현역 시절 '수비형' 포수라는 평가를 받았던 김 감독의 통산 OPS도 0.546은 됩니다. 원태인이 무너지면서 조상우는 결국 1-3으로 점수가 벌어진 상황에서 4경기 연속으로 마운드에 올라야 했고, 1-7까지 점수가 벌어지고 난 뒤에야 마운드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김 감독은 "중간 계투진을 더 뽑았어야 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에 "결과로 이야기한다면 감독이 별로 할 말은 없다"면서 "선발진이 지금까지 잘 던졌는데 계투를 많이 뽑았다면 어떻게 됐겠나"라고 반문했습니다. 단언컨대 구원투수를 더 데려갔다면 김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기겠다는 프로 팀이 분명히 나왔을 겁니다. 김 감독이 달라졌다는 증거가 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김 감독은 두산과 NC에서 이미 실패했던 자기 스타일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채 증명하고 싶은 욕심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프로 무대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또 패장이 되는 실수를 반복하고 말았습니다. (김 감독은 정규 리그나 한국시리즈 우승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과연 이번 참사를 계기로 한국 야구는 이 달라진 세상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설마 '헝그리 정신이 필요하다'는 낡은 타령만 늘어놓는 건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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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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