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무와 오골성 전투-고구려 부흥전쟁(3)
[고구려사 명장면-130]고구려 멸망 및 부흥전쟁과 관련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당이 남긴 기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독자의 기록을 상당수 담고 있어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본 연재에서도 신라본기 기록을 이용해 고구려 멸망 당시 평양성 최후의 항전을 새롭게 살펴본 바 있다. 고구려 멸망을 앞둔 최후의 전쟁이 전개되면서 신라군도 당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 정벌군을 편성하고 문무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고, 평양성 공격에 신라군도 참여했다. 그런데 평양성 함락 이후 당의 이세적은 신라군의 역할을 폄하하거나 아예 무시하고자 했다. 이를 눈치챈 신라는 후일을 위해서도 독자적으로 관련 기록을 제법 충실하게 남기고 있었던 듯하다. 아울러 신라 또한 고구려 멸망을 문무왕의 업적으로 크게 현양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고구려 부흥전쟁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당의 입장에서는 정복한 고구려 땅에서 저항과 부흥전쟁이 크게 일어난 사실을 굳이 상세하게 기록할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스스로 크게 자부하고 자찬했던 고구려 정벌의 성과를 퇴색시키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 측 기록에 의거해 고구려 부흥전쟁을 구성하면 매우 소략해진다. 겨우 안승과 검모잠을 중심으로 황해도 일대 즉 당으로서는 가장 변방에서 잠깐 일어났다가 진압된 정도일 뿐이다. 그래서 지난 회에 언급한 바와 같이 문헌기록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은 부여와 책성 지역에서의 고구려 부흥전쟁을 고구려 유민 묘지명 등에 보이는 단편 기록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 멸망 이후 당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 있었다. 군사동맹 관계였던 신라와 당이 백제 영역의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빚으면서 670년 이래 나당전쟁을 치르게 되자,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직접·간접으로 지원하면서 당군에 맞섰다. 따라서 자연스레 고구려 부흥전쟁의 양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전할 수 있는 자료들이 산라 측에 남게 되었다. 특히 신라본기에 전하는 고구려 부흥전쟁 초기 양상을 짐작할 수 있는 몇몇 기사는 더욱 중요하다.
사실 평양성의 함락과 고구려의 멸망이 다소 허망하게 끝난 것은 곧 지배층의 분열과 배신, 핵심 지배층의 무능 때문이었다고 하더라도, 수양제와 당태종의 대규모 침공도 물리쳤던 고구려인들이 700백년 왕조가 무너졌음에도 별다른 저항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던 점이 못내 석연치 않았다. 일단 아쉬운 대로 신라 측 자료를 중심으로 부흥전쟁의 시작 모습을 살펴보자. 먼저 다음 기록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669년 2월에 보장왕의 서자(庶子) 안승(安勝)이 4천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이 기사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실려 있는 기사이다. 그런데 중국 측 자료에는 이 기사가 전혀 전해지지 않으니, 아마도 신라에서 전해지는 자료를 <삼국사기> 편찬자가 고구려본기에 수록한 것으로 생각한다. 왜 이 기사만 신라본기가 아니라 고구려본기에 수록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신라본기에 기록된 안승 기사와는 계통이 다른 문헌에 실려 있었던 기사가 아닌가 싶다. 안승의 신라 투항과 부흥운동에 대해서는 다음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안승이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한 시점이 669년 2월이라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지난 연재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당 정부는 669년 5월에 3만호에 가까운 고구려 주민을 당의 내지로 이주시켰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민으로서 이반한 자가 많아서, 669년 4월에 사민하기로 정책을 세우고, 5월에 본격적으로 대규모 사민을 추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믿기 어렵다. 15만명에 가까운 주민들의 사민을 불과 한 달 만에 집행한다는 게 쉽지 않다.
아마도 당 정부는 고구려 멸망 무렵부터 평양성 주민들을 비롯한 고구려 핵심 세력들을 대거 사민시켜 아예 평양 일대를 텅 비워버리기로 마음먹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를 멸망시킨 공식적인 의례가 모두 끝난 668년 12월부터 대규모 사민 준비를 은밀하게 추진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눈치챈 고구려인들이 이탈하기 시작했고, 이에 당은 669년 4월부터 서둘러 이주정책을 시행했던 것이다. 그 구체적인 근거가 바로 안승과 4천여 호의 신라 투항이다.
안승이 거느린 4천여 호 주민의 실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이 당의 사민 대상이었던 고구려 지배층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신라쪽으로 남하 투항한 것으로 보아 평양성 주민 보다는 3경(京)의 하나인 한성(漢城: 황해도 재령) 출신들이 아닐까 싶다. 신라는 후일 이들 주민집단을 금마저 즉 익산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여기에 제후국으로서 보덕국을 설치했다.
4천여 호가 되는 많은 주민들이 정든 삶의 터전을 버리고 신라로 망명할 때에는 그만큼 절박한 상황에 놓였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신라는 당과 동맹국으로서 평양성 함락에 참여했던 적국이 아니던가. 아직 신라와 당 사이에는 눈에 보이는 갈등이 없었으니, 고구려 유민들에게 신라는 여전히 위협적인 적국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 땅을 떠나 신라로 망명한 데에는 신라 땅보다 더 혹독한 곳으로 이주를 강요당할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리라.
당의 강압적인 점령과 사민에 대항하는 고구려인의 이탈은 안승의 사례 외에 더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실려 있는 문무왕 10년(670년) 기사이다.
"3월에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는데, 말갈 군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4월 4일에 마주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목 베어 죽인 숫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에서 지켰다."
이 기사는 이른바 나당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설오유가 이끄는 1만명 신라군과 고연무가 이끄는 1만명 고구려군이 합동으로 압록강을 건너 오골성까지 진격해 당군과 충돌하였다. 어제까지의 동맹국이었던 신라군과 당군이 충돌하고, 어제까지 적국이었던 신라군과 고구려군이 합동작전을 벌이고 있으니, 이 전투는 이제까지의 동맹-적대 관계의 판도가 뒤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위 기사의 옥골(屋骨)은 요동지역 고구려의 최대 거점성인 오골성이다. 요동지역에서 침공해오는 세력을 방어하는 압록강 전방의 최후 방어기지였다. 반대로 한반도에서 진공하자면 요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최전방 거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요충지를 신라와 고구려군이 공격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의 요동 지배에 대한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도 서둘러 우선 말갈군을 투입하고 뒤이어서 당군을 진격시켰다.
고구려군과 신라군 연합군은 말갈군을 대파했음에도 당군과의 전투를 피해 백성(白城)으로 후퇴했다. 여기의 백성은 압록강의 요충지인 고구려 박작성(泊灼城)으로 추정된다. 당 본군과의 전투를 피한 것은 가급적 당과의 전면전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신라 측 전략으로 보인다. 어쩌면 당의 입장에서는 오골성 전투를 벌인 상대가 고구려 부흥군으로만 알고, 신라군이 함께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를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당군과 한판 승부를 겨루어 부흥전쟁의 불길을 당기려는 고연무와 고구려군 입장에서는 매우 아쉬운 대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참 등 신라군의 후원 없이는 더 이상의 전투를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물러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고연무와 고구려군 정예병 1만명 군대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위 기사에서 고연무는 고구려 태대형 벼슬이다. 태대형은 제2위의 관등으로 최고위 자리다. 태대형 벼슬이 고구려 멸망 전부터 갖고 있던 관등인지, 아니면 고구려 멸망 이후 부흥군을 이끌면서 갖게 된 것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고연무가 고구려에서 상당한 정치적 비중을 갖고 있던 인물임은 틀림없다. 고연무가 거느린 1만 군대는 정예병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여기저기 흩어진 고구려 잔병들을 모았다기 보다는 애초부터 고연무가 거느린 병력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싶다. 고연무와 1만 고구려군도 안승과 4천여 호가 신라로 망명한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 신라로 투항한 경우가 아닌가 짐작된다.
고연무의 고구려군과 설오유의 신라군이 별다른 충돌 없이 압록강까지 진격한 것으로 보면, 이때에 이미 한반도 서북부 일대는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당의 안동도호부마저 신성으로 옮긴 뒤이기 때문에 공백 지대나 다름없었음을 알 수 있다. 당은 고구려에 대한 트라우마로 아예 평양 일대를 텅 비워서 부흥의 싹을 없애려고 했지만, 남아 있는 고구려인들은 그 공백 지대에 다시 고구려 부흥의 의지를 심고자 했다. 그 하나가 바로 고연무와 1만 고구려군에 의한 오골성 전투이다.
이렇게 670년 오골성 전투는 고구려 부흥전쟁이 본격화됐음을 알리는 효시이며, 동시에 신라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당과 승부를 겨루려는 담대한 첫걸음이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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