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의반도] 5·18 민주화운동을 가르친다는 것

한겨레 2021. 8. 1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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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세대와 달리, 현재 광주의 학생들은 5·18을 교실에서 수업으로 배운다. 이들이 생각하는 5·18의 이미지도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졌다. 올해 5월 광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진행된 5·18 전시. 김영주 제공
“왜 5·18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떠오른 것은 이 때문이었다. 역사 교사인 나조차도 5·18 교육과 관련해서 “왜”라는 질문을 제대로 던져본 적은 없었다.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나?”라는 질문을 수업 시간에 언급했을 때도, 묻는다기보다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단계였을 뿐이다. 자칫 ‘왜’가 역사적 비극을 가볍게 만들거나 폄훼와 왜곡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왜라는 질문은 5·18의 역사와 정당성을 왜곡하려는 사람들이 자주 쓴다.

5·18 민주화운동을 왜 배워야 하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5·18은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호흡하듯 자연스럽게 접하는 광주의 공기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해마다 5월이면 전남도청이 있던 금남로에는 크고 작은 무대가 세워지고 많은 사람이 모인다. 5·18을 기념하는 흥겨운 공연과 함께 각종 사회문제가 무대 위에서 논의되곤 했다. 5·18을 기념하고 시국을 논하는 밤이 깊어지면 어김없이 거리 한쪽 구석에는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지금은 잘 보이지 않지만 어릴 적 5월의 거리엔 고통에 몸부림치듯 소리 지르는 사람들이 자주 보였다. 광주 여기저기에서 목격되는 5·18에 대한 기억과 상처는 몸으로 전해지는 것이었지, 교실 책상에 앉아 머리로 배워야 하는 사건은 아니었다.

5·18에 대해 고민해보지 못한 채 역사 교사가 되었다. 지역의 분위기 속에서 5·18을 체득했던 나와는 달리 현재 광주의 학생들은 5·18을 교실에서 수업으로 배우는 세대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5·18의 이미지도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졌다. 10여년 전, 초임 교사로 만났던 학생들은 ‘탱크, 군인, 피, 전쟁’과 같은 국가폭력을 상징하는 그림들로 5·18을 기억하였으나, 근래에는 ‘택시운전사, 주먹밥, 시민군, 헌혈’ 등 공동체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5·18을 이야기한다. 5·18의 이미지가 국가폭력의 비극에서 공동체의 통합으로 확장된 것은 그동안 학생들이 5·18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조금이라도 갖기를 바랐던 교육자들의 노력이 반영된 덕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생들의 답변에서 바뀐 것은 5·18에 대한 이미지일 뿐 내용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희생하신 분들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하고 기억합니다” 같은 기념의 언어로 5·18에 대한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 1980년 당시 고등학생으로서 5·18 항쟁에 참여하셨던 분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학생들의 질문은 과거의 역사나 비극적인 경험과 관련된 내용에 한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서, 지금 고등학생인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장 큰 고민인데, 혹시 5·18을 겪은 이후에 장래에 대한 고민은 어땠는지, 어떻게 살아갔는지, 5·18 이후 침묵하게 했던 사회에서 받은 상처와 충격은 어떻게 견뎠는지와 같은, 5·18이 개인의 삶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에 관해 자신의 공감을 표현하는 질문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오직 5·18 현장에서 무엇을 봤는지, 그때 얼마나 절박하고 분노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쳇바퀴 돌듯 한동안 반복된다.

학생들은 묻지 않는다

5·18에 대한 물음이 없는 것은 학생들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내가 근무하고 있는 광주여고는 광주의 화정동에 있다. 바로 근처에는 1980년 5월, 삶과 죽음이 공존했던 국군광주통합병원이 있다. 학교 근처에 5·18 피해자들을 치료하고 혹은 비밀스레 감금했던 아픔이 서린 역사적 공간이 있음에도 아이들은 이곳에 대해 별 질문이 없다. 다만 흉가처럼 무서운 장소로 이야기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접근 위험’이라는 팻말의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텅 빈 건물은 정말로 가까이 가면 위험한 장소로 보일 뿐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다. 벌써 몇번의 비엔날레 때 5·18 관련 특별전시가 그곳에서 여러번 있었는데도 학생들은 관심이 없다. 학교 수행평가와 지필고사, 동아리 활동까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일까? 광주의 오월은 텔레비전이나 수업 시간 교과서에서만 잠깐 나오는 것이기에 도시 어느 곳에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 정말 ‘있다’라는 감각은 100m 근방에 있더라도 쉽게 생기지 않는 모양이다.

“왜 5·18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떠오른 것은 이 때문이었다. 역사 교사인 나조차도 5·18 교육과 관련해서 “왜”라는 질문을 제대로 던져본 적은 없었다.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나?”라는 질문을 수업 시간에 언급했을 때도, 정말 묻는다기보다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단계였을 뿐이다. 자칫 정해지지 않은 ‘왜’가 역사적 비극을 가볍게 만들거나 폄훼와 왜곡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왜라는 질문은 5·18의 역사와 정당성을 왜곡하려는 사람들이 자주 쓴다. “왜 5·18 유공자만 더 특혜를 받냐?”고 따지며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라고 시위했고, 과거 전국으로 5·18을 알리는 데 사용됐던 사진들을 음모론으로 물고 늘어졌다. 사진 속 한명 한명의 얼굴을 빨간 원 안에 집어넣고, 빨간 화살표로 가리키며 북한에서 내려온 아무개라며 이름을 붙였던 일은 널리 잘 알려져 있다.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조작하는 이야기들이 인터넷에 떠돌았고, 5·18이라고 이름 붙은 게시물에는 집단적으로 악플이 붙었다. 문제는 이것들이 사실이 아니어도 자극적으로 관심을 끌며 혐오를 선동한다는 데 있다. 질문을 가장한 혐오와 적대의 구호가 인터넷을 거쳐 학생들에게 전해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학교는 학생들이 5·18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고 질문하도록 수업을 하기보다는 아이들이 왜곡과 선동에 휘둘리지 않도록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고, 소위 올바른 견해와 관점을 심어주는 데 급급한 게 현실이다.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왜가 정작 필요한 왜의 질문을 막는 셈이다. 그것이 5·18에 대한 청소년 세대의 무관심을 부르고,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진짜 목표라면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5·18 교육의 지향점은 ‘질문’을 산출하는 데 있지 ‘답’을 확정하는 데 있지 않다. 하지만 5·18을 둘러싼 ‘혐오 발화’나 어느 학교 앞에서 이뤄진 극우들의 ‘증오 행동’도 질문에서 시작해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무엇을 위한 것인지 온전히 파악할 시간을 갖는다면, 학생들은 그것에 대응하고 극복할 힘도 기를 수 있다. 실제로도 성인이 된 후에 출신지가 광주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과 혐오로 상처받았다는 이야기는 부지기수이다. 교육이 성적을 통해 서열과 차별을 조직하고 있긴 하다. 그럼에도 현재의 이런 무차별적인 공격의 사회적 의미를 5·18을 통해 함께 성찰할 기회 역시 교육의 자리에서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논의가 끊이지 않고 활발하게 이어져서 교육 현장에서 쓸 수 있는 좋은 언어가 많이 만들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5·18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 교실에서 오가는 ‘질문’은 광주의 학생들에겐 역사이면서 지역학이고 또 이웃의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대면하고 관계와 자세를 만들어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5·18 교육이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을 만드는 것이 꼭 필요한 이유다.

교사부터 물어야 한다

그러니 5·18 교육을 고민하는 사람들부터 ‘왜 5·18을 지금 가르치는지’를,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자세한 맥락과 연관하여 스스로 묻고 서로 만나서 논의할 수 있길 바란다. 그것이 지금 이곳의 현재에 대한 얘기라면 교사들만이 아니라 지역이 함께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다. 예를 들어 5·18의 생존자와 그 가족이 긴 세월 동안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먼저 이야기했던 건, 국가가 아니라 지역이었다. 지역사회는 국가적 차원으로는 보이지 않는, 지역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구체적인 문제를 찾을 수 있고, 그것을 의제화하여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충분하다. 지역의 구체적 문제에서 시작할 때, 우리가 5·18을 기억하는 방식에서 지역의 누가 소외되었나를 돌아보면서 증언으로 기록되지 않은 소수자의 목소리도찾을 수 있다. 당시 벌어졌던 성범죄 문제가 무엇이었으며 지역에서 어떤 이중적인 트라우마를 겪었는지도 다시 살필 수 있다. 지난 6월의 ‘학동4구역 붕괴 참사’처럼 5·18과 관련하여 지역에서 어떤 균열을 겪었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현실을 직시하는 문제까지도 교육 현장에서 어떻게 논의할 수 있는지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5·18 교육이 특정 소수 사람들의 열정에 기대어 폐쇄적인 구조로 이루어지기보다는 더 열려 있기를 바란다. 장기적인 호흡으로 연구기관, 기념관과 미술관, 학교교육과 시민사회가 만나 5·18 교육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계속 쌓여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길, 그래서 나 같은 현장 교육자가 교실에서 지역사회의 논의를 바탕으로 용기 있게 학생들과 만날 수 있게 되길 고대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쌓을 지금의 ‘질문의 두께’가 다음 세대가 경험하게 될 5·18의 모습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김영주 | 광주모더니즘

광주에서 근무하는 16년차 교사. 대학에서 역사교육을 전공. 막상 가르치며 여러 도전과 질문을 받게 되어 숙제하듯 하나씩 이제 진짜 공부를 하는 중. 통합적 교육의 가능성을 탐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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