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동아시아 무역의 시대 '물류 허브'였던 신라..서·중앙아시아 잇는 실크로드 출발·종착점
(60) 신라의 산업과 무역활동
신라는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켰고, 668년에는 고구려와 당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당나라 편을 들었다. 661년부터 신라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와 갈등을 빚다가 전쟁을 시작했다. 신라는 국력이나 전력을 비교하면 약세였지만 화랑정신 등으로 다져진 특유의 용기와 자주의식을 갖고, 복국전쟁을 벌이던 고구려 유민, 백제 유민을 포섭해 민족전쟁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토번(티베트)의 계속되는 공격과 아랍세력인 압바스 왕조의 중앙아시아 진출, 실크로드 지역과 투르크 등 북방 지역의 동요 등 유라시아 세계의 역학관계와 혼란을 겪는 당나라의 내부 사정을 활용했다. 그리고 당나라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결국은 8년 전쟁에서 승리하며 676년에 불완전하지만 자체의 통일을 이룩했다.
하지만 7세기 후반에 신라는 내부적으로 위기를 극복해야만 했고, 재편된 신국제질서 속에서 자기 위상을 적립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고구려가 부활한 북국인 발해와는 군사적인 긴장 상태에 있었고, 새로 탄생한 일본국과는 충돌을 그치지 않았다. 내부에서도 토지의 황폐화, 인명의 손실, 군수산업 약화로 인한 산업구조의 혼란, 고구려·백제 유민 흡수와 처우 문제, 사회 갈등 등 전쟁과 통일의 후유증이 산적했다. 그 가운데 국부를 창출시키는 정책이 근본적이었다. 산업을 발전시키고, 무역을 활성화시키는 일이었다.
동아시아 세계의 안정과 무역의 시대
동아시아 세계는 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전후 질서가 안정되고, 국가들 간 충돌도 줄어들었다. 이제 정치와 군사가 주도하는 냉전질서에서 벗어나 외교와 무역, 문화를 주고받는 열전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당나라는 중앙아시아의 헤게모니와 실크로드 무역권을 둘러싸고 아랍의 압바스왕조, 토번, 실크로드 도시국가 등과 전쟁을 이어갔으나 기본적으로는 점차 안정을 되찾고 경제발전에 주력했다. 상공업과 무역을 발전시키면서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 동로마까지 이어지는 해양 실크로드를 조직적으로 활용했다.
발해도 당나라와 우호 관계를 수립하면서 확장된 유라시아 무역망에 진입하기 위해 당나라에 무려 130차례나 사신단을 파견했다. 신라도 8세기에만 60회 이상의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당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했다.
신라는 서해와 동중국, 남해를 이용할 수 있는 물류망의 허브였다. 조선술과 항해술 등이 뛰어나 동아지중해의 무역시스템을 활성화시키는 데 적격이었다. 그런데 이익을 더 많이 얻으려면 당나라 상품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일본의 토산품과 공산품을 당나라에 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해야 했다. 일본에 시장을 개척하고, 수출망을 확장해야만 했다. 당시의 국제 관계와 일본의 해양 능력으로는 발해와 일본 간에는 직접 무역하는 일이 매우 어려웠으므로 유리한 환경이었다.(윤명철 《한국해양사》)
서아시아부터 당나라 일본까지 연결하는 무역망
신라는 668년부터 779년까지 일본에 사신단을 47회나 파견했다. 사신단은 공무역까지 겸했으므로 인원이 많았다. 752년에 나라(奈良)에서 도다이사(東大寺)가 완성됐을 때 왕자인 김태렴(金泰廉)은 7척의 배에 700명이라는 대사절단을 이끌고 갔다. 그들 가운데 반은 수도인 헤이코조(平城京)와 외항인 나니와(오사카 지방)에서 무역했고, 남은 인원은 규슈의 대재부(고로칸)에 머물며 장사했다. 사신단들은 체류 기간이 길어 일본 야마토 조정이 신라로 파견한 견신라사들은 보통 7개월에서 12개월 동안 신라에 체류했다.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신라는 자연스럽게 제철·제련·직조업 등의 산업이 발전했다. 수도인 경주 주변에는 크고 작은 공방이 많이 생겼다. 조하주·어아주·루응령 같은 값비싼 비단 명주 제품과 금은 세공품, 생활용품 불교용품을 생산했고, 이 물건은 외국으로 수출됐다. 일본에는 1년에 한 번씩 공개하는 정창원이 있는데, 이곳에 신라 보물이 많이 소장됐다. 또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에는 신라먹·종이·악기·모전(모직요)·잣·꿀·경전·불교도구들·거울·사발(佐波理) 등의 물품 목록이 있다. 또 훈육향·청목향·정향·곽향·령육향·감송향·용뇌향 등 남중국·동남아시아·인도·아라비아산, 페르시아산의 각종 향료와 약재를 팔았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인도와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사는 공작꼬리, 비취새의 깃털, 타슈켄트산 슬슬, 아라비아산 모직깔개인 구수, 인도양에서 잡은 바다거북의 등껍질을 비롯해 자단목·침향 같은 남방계 물품이 기록돼 있다.
신라가 당나라 및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 이슬람권 상인들과 무역을 벌인 것이다. 이븐 쿠르다지바(820~912년)의 《제 도로 및 제 왕국지》 같은 아랍의 문헌에는 아랍 상인들이 신라에 온 사실과 신라의 상황, 수입 상품이 기록돼 있다.(정수일 《신라·서역교류사》) 아랍 상인이 신라에 거주했다는 증거는 처용가나 경주 괘릉에 서 있는 페르시아인 석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춰 신라는 당나라에서 정치적인 안전을 보장받고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 국가와 간접무역을 벌였고, 일본국과 중계무역까지도 했다. 무역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797년에 편찬된 《속일본기》에는 신라 물품을 구매하려는 좌대신, 우대신 등의 대관과 왕녀들에게 구매 대금으로 서경인 대재부에서 면 7만여t을 줬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현상은 발해도 동일했다. 하지만 명실 공히 육상 및 해양 실크로드의 종착역은 발해도 일본도 아니라 신라였다.
√ 기억해주세요
동아시아 세계는 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전후 질서가 안정되고, 외교와 무역, 문화를 주고받는 열전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신라는 서해와 동중국, 남해를 이용할 수 있는 물류망의 허브였다. 신라는 당나라를 통해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 국가와 간접무역을 벌였고, 일본국과 중계무역까지도 했다. 육상 및 해양 실크로드의 종착역은 발해도 일본도 아니라 신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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