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무급 인턴'이라니, 그것도 유엔에서

이홍근 기자 2021. 8. 1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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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인권 수호기관의 시대착오적 '열정 페이'

[경향신문]

국내 사무소 17곳 중 15곳 ‘0원’…2곳은 식비·교통비 ‘찔끔’
근로계약 아닌 인턴십 협약서…6년 전에도 ‘노숙 인턴’ 논란

올해 초 대학을 졸업한 A씨의 꿈은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것이다. 구직 활동에 나선 그에게 한국 주재 유엔사무소 인턴 채용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일체의 급여나 생활비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마음에 걸렸지만 A씨는 지원서를 냈고 인턴에 합격했다. 그러나 맞닥뜨린 현실은 예상보다 더 열악했다. A씨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사무소에 출퇴근하기 위해 집을 새로 구해야 했다. 월세와 식비 등을 더하니 한 달에 100만원 넘게 들었다. A씨는 퇴근 후 따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15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한국 주재 유엔사무소 대부분이 인턴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는 유엔 국제이주기구,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등 17곳의 유엔 산하기관 사무소가 있다. 이들 사무소에서 근무 중인 직원은 총 300명 안팎인데, 3분의 1가량이 인턴으로 알려졌다. 한 사무소 관계자는 “임금을 지급하는 기관은 17곳 중 유엔난민기구와 유엔세계식량계획 2곳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월 150만원 정도가 식비와 교통비 명목으로 지급된다.

유엔이 인턴에게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근거는 1996년 11월 통과된 결의안이다. 결의안은 “유엔 인턴십 프로그램은 참가자들이 유엔 활동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유엔은 인턴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숙소나 생활비는 인턴 자신이나 후원 기관이 부담한다”는 내용도 있다. A씨도 유엔 사무소에 처음 출근했을 때 근로계약서가 아닌 ‘인턴십 협약서’를 작성했다.

유엔의 무급 인턴 문제는 2015년 세계적으로 논란이 된 바 있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엔 본부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뉴질랜드 청년 데이비드 하이드가 본부 앞에 텐트를 치고 노숙하는 사진이 공개됐다. 그는 6개월짜리 인턴십에 지원해 합격했지만 유엔의 무급 정책으로 방을 구하지 못했고, 결국 호숫가에 텐트를 치고 생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유엔 인턴들이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무급 인턴 제도를 규탄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인턴 지원자들은 국제기구에서 경험을 쌓을 드문 기회라 여겨 지원한다. A씨는 “국제기구 인턴 자리가 워낙 귀하다. 유일하게 여기만 붙었길래 무급이지만 인턴 이력 한 줄 넣으려고 일했다”며 “솔직히 식비 정도는 지급할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없었다.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부모의 지원을 받을 수 없거나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사람은 선뜻 지원서를 내기조차 어렵다.

평화와 인권을 기치로 내건 유엔이 인턴에게 ‘열정 페이’를 강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하은성 권유하다 노무사는 “유엔이 법률적인 공백을 이용해 임금을 착취하는 건 과거 논란이 됐던 고등학교 현장 실습생 노동력 착취와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노무 제공 방식을 보면 노동자가 맞으나 노동자성을 인정받으려면 인턴이 직접 소송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소송 이후 인턴 자신에게 쏟아질 불이익을 생각하면 쉽게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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