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그 후 110년, 아직 진정한 광복은 오지 않았다"

박종대 2021. 8. 15.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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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내용 요약
부친 동암 차리석 선생 임시정부 비서장 역임…광복 24일 만에 숨져
도산 안창호 강연 듣고 독립운동 길 나서
백범 김구 선생 중매로 임정서 독립운동 돕던 여성과 백년가약
차영조 선생 "국립독립유공자묘지 따로 조성해야"

[의왕=뉴시스] 백범 김구 선생의 중매로 인연을 맺어 결혼을 올린 동암 차리석 선생(우측)과 홍매영 여사. 2021.8.15. (사진=차영조 선생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의왕=뉴시스] 박종대 기자 = "지금처럼 분단된 한반도에서 후손들이 살기를 바라고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은 아니었을 텐데…"

제76주년 광복절을 나흘 앞둔 11일 경기 의왕시 내손동 자택에서 만난 동암 차리석(1881~1945) 후손인 차영조(77) 선생은 "일제에 나라를 뺏긴 뒤 광복을 거쳐 110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주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같이 아쉬워했다.

그의 집 거실 한 쪽 벽면에는 부친인 차리석 선생과 모친인 홍매영 여사, 고모 차보석, 작은 아버지 차정석 열사가 고인이 된 뒤 정부로부터 각각 추서받은 독립유공자 훈·포장과 표창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이뿐만 아니다. 차리석 선생의 얼굴이 담긴 그림과 효창공원에 묻힌 아버지 묘소를 비롯해 부친과 임시정부(임정) 역사를 기록한 저서 등을 집 안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집 양쪽 베란다 밖으로는 태극기 깃발도 나란히 1개씩 꽂혀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태극기 한 번 제대로 못 날려보고 돌아가신 분들이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위로라도 받을 수 있도록 바깥에 걸어놓았다"고 말했다.

[의왕=뉴시스] 1945년 8월 15일 일제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한 지 24일 만에 과로로 숨진 차리석 선생의 영결식. 태극기 깃발이 덮혀진 관 뒤에 선 채로 부인인 홍매영 여사가 당시 두 살이던 차영조 선생을 안고 있고, 사진 좌측 두 번째 옆으로 백범 김구 선생이 보인다. 2021.8.15. (사진=차영조 선생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차영조 선생의 부친인 차리석 선생은 임정에서 비서장까지 지내면서 '임정의 버팀목'으로 불리던 인물이었는데, 1945년 광복을 맞이하고 24일 만에 임정의 환국을 준비하면서 과로로 숨졌다.

차리석 선생이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영향이 컸다. 안창호 선생의 강연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지금의 숭실대학교 전신인 숭실학교를 졸업한 그는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에 들어가 교사로서 민족교육사업에 몸을 담았다. 안창호 선생이 결성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1911년 일제가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민족지도자 600여 명에게 데라우치 총독 암살 누명을 씌워 검거하고, 이 중 105명을 기소한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임정이 수립되자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다가 편집국장을 맡아 일제 감시 속에서 독립운동 소식을 담은 인쇄물을 발행했다.

차리석 선생은 임정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하면서 비서장 역할을 맡아 임정의 살림을 책임지며 1945년 8월 15일 일제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했다.

[의왕=뉴시스] 동암 차리석 선생. 2021.8.15. (사진=차영조 선생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하지만 광복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임정의 환국 작업을 준비를 하던 그는 두 살짜리 아들과 부인을 남겨둔 채 과로로 생을 마감했다. 바로 그 아이가 차영조 선생이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차리석 선생은 환갑을 넘어 백범 김구 선생의 중매로 임정 요인들을 헌신적으로 돕던 홍매영 여사와 인연을 맺고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김구 선생은 나이 든 동암에게 아들이 태어난 것은 '하늘의 축복'으로, 이를 따서 차영조 선생이 태어났을 때의 아명(兒名)을 '천복'(天福)으로 붙여주기도 했다.

이렇게 백범 김구가 다섯 살 손아래인 차리석 선생을 형제처럼 각별한 마음으로 신경을 썼던 것은 그가 '임정의 버팀목'이었기 때문이다. 차리석 선생은 임정이 돌아갈 수 있도록 안살림은 물론 독립운동가와 그의 가족들까지 보살폈다. 이는 김구 선생이 신뢰하지 않으면 맡을 수 없는 역할이었다.

1932년 1월에 이봉창 의사가, 4월에 윤봉길 의사가 각각 일제에 맞서 의거를 일으켜 일본 탄압이 심해지자 임정은 피란을 시작했다. 무려 8년 동안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4000㎞에 이르는 길이었다.

[의왕=뉴시스] 차리석 선생과 홍매영 여사, 고모 차보석, 작은 아버지 차정석 열사가 정부로부터 수여받은 독립유공자 훈·포장과 표창. 2021.8.15. (사진=차영조 선생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 과정에서 차리석 선생은 분당 싸움이 거듭되며 임정을 폐지하자는 목소리까지 나왔지만, 1935년 항저우에서 송병조와 함께 임정의 명백이 끊기지 않도록 의정원 회의를 열었다. 이를 통해 비어있던 국무위원 5명을 선출하면서 임정을 다시 재정비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차영조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을 가까이 모셨던 윤경빈 경위대장은 김구 선생이 흘리는 눈물을 세 번을 봤다고 증언한 적이 있는데, 이 중 한 번이 차리석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였다고 한다"며 "그만큼 김구 선생과 부친은 돈독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부친의 영결식 모습이 기록돼 있는 흑백사진을 보면 김구 선생이 아버지 시신이 들어있는 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지키며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며 "자신이 중매를 선 홍매영 여사가 어린 아들을 안고 남편을 떠나보내는 것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차영조 선생은 1946년 중국에서 배를 타고 어머니 홍매영 여사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혈혈단신인 어머니는 함께 중국에서 생활했던 임정 요인들에게 도움을 청할 법도 했지만, 강인한 성격으로 단속을 피해 양담배를 팔아 홀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이후 6·25 전쟁이 터지고 그의 가족은 충남 부여로 피란을 왔다. 이곳에서도 어렵게 가계를 꾸려가던 어머니는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행상을 하다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그는 더 이상 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채 생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여관과 식당을 전전하면서 돈이 되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이 시기 한 줄기 빛이 돼서 큰 도움을 준 독립운동가 가족들도 있다. 이들은 차영조 선생이 독립운동가 자녀로서 이 사회에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학업을 지원하고 일자리를 연결해줬다.

[의왕=뉴시스] 박종대 기자 = 제76주년 광복절을 나흘 앞둔 11일 경기 의왕시 자택에서 동암 차리석의 후손인 차영조(77) 선생이 걸어둔 태극기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2021.8.15. pjd@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홍매영 여사는 1979년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충남 부여에 소재한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는 2018년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어머니 기록을 수집해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한 뒤 이를 인정받아 이듬해인 4월 국립현충원으로 유해를 옮겼다.

그는 올해 광복 76주년을 맞아 '국립 독립유공자 묘지' 조성에 나서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낸다. 광복 후 친일파를 걸러내지 못한 채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지금까지도 국립묘지에 묻힌 친일파를 옮겨야 한다는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3·15의거기념일, 4·19혁명기념일, 5·18민주화운동 등 민주화 열사 희생을 기리기 위한 국립묘지는 경남 창원과 서울, 광주에 각각 1곳씩 설치돼 있다. 반면 독립유공자 묘지는 다른 국가유공자 묘지와 함께 합동묘역에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백범김구기념관'이 개관한 데 이어 현 정부에서는 오는 11월 말께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문을 열 예정이다. 시기적으로 독립유공자 예우 차원에서라도 별도의 묘역 설치도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차영조 선생은 "우리 사회가 독립유공자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후대가 독립유공자 자손은 가난하고 친일파 자녀는 부자라는 인식을 갖는 모습을 지켜보면 씁쓸해진다"며 "조국의 평화를 위해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 정신을 잘 이어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다각도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pjd@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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