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서는 간첩, 북한에서는 '혁명 영웅'이었던 남자

김형민 2021. 8. 15.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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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민 PD의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역사 덕후' 아빠가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속 사건과 인물 이야기. 필자는 언젠가 '손녀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를 하게 되기를 꿈꿉니다.
북한 〈노동신문〉이 밝힌 성시백의 '혁혁한 공로'는 다음과 같다. "괴뢰 국방부부터 사령부, 헌병대, 육군 정보국에 이르기까지 조직선을 늘리고 적군 와해공작을 벌였다."
북한에 있는 간첩 성시백의 묘비.

성시백은 북한이 혁명 영웅으로 떠받드는 간첩이다. 남한 정부에 붙잡히는 바람에 시신을 찾지 못하게 되자 가묘까지 만들어 혁명열사릉에 그를 ‘모셨지’. 대체 무슨 공작 활동을 했기에 이런 대우를 받는 걸까?   

1905년생으로 황해도 평산 출신인 그는 국내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했어. 그리고 곧 ‘정보의 세계’에 눈을 떴다. 국민당 통치 아래 놓인 서안 지역에서 공산당 정보기관의 총책임자로 암약하며 정향명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지. 그는 국민당 군대에서 이름이 높았던 장군 후쭝난(호종남)의 막료로 활약하기도 했거든. 즉 최고의 적장 턱밑에 들어앉은 간첩이었던 거야.

후쭝난은 중국공산당에 공포의 존재였고 한때 중국공산당의 피난 수도라 할 옌안까지 함락시킨 용장이었지만 결국 중공군에게 전력의 태반을 잃고 타이완으로 쫓겨갔다. 그의 부하로 슝샹후이(웅향휘)라는 이가 있었어. 후쭝난이 가장 믿은 부하였다. 변복을 하고 순시를 나갔다가 노숙한 적이 있었는데 깨어보니 슝샹후이가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자신을 지킨 것을 발견한 적도 있다니 그 믿음이 오죽했겠니. 그러나 그는 중국공산당의 간첩이었다.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와 그가 가장 신뢰하는 장군 후쭝난 사이의 모든 연락 내용은 슝샹후이의 손을 거쳐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에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러니 후쭝난이 용을 빼는 재주가 있다 해도 중공군을 이길 수는 없었지.

성시백은 남한에서 거의 슝샹후이의 반열에 오를 뻔한 사람이었어. ‘오를 뻔’했다고 표현한 건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쫓겨간 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공산당에 복귀한 슝샹후이와는 달리 성시백은 한국 공안 당국의 추적에 걸려 체포돼 처형당하고 말았기 때문이야.

성시백은 후쭝난의 막료로 있으면서 임시정부 요인들과도 친분을 쌓았어. 백범 김구나 그 비서 엄항섭,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가 되는 이범석, 중국군으로 별 두 개, 한국군으로 별 세 개를 달았던 ‘오성장군’ 김홍일 등과 친밀하게 지냈지. 그러던 그가 서울에 나타난다. “열혈청년 시절에 나라를 광복코자 황해를 건너갔던 정향명 선생, 해방 소식에 접하자 귀로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타국에 의연히 남아 방랑하던 동포들을 모아 귀국을 종결짓고 떳떳이 환국했다(〈노동신문〉 1997년 5월26일).”

성시백은 곧 북으로 올라가 김일성, 김두봉을 만나고 지령을 받아 남쪽으로 내려온다. 그의 장기인 정보 업무, 즉 스파이 임무였지. 김일성보다 일곱 살 위였지만 성시백은 김일성의 지도력을 인정했고 “장군님 말씀을 받고 보니 앞이 탁 트입니다(〈노동신문〉)”라고 고백했다고 해.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는 표현을 예사로 사용하는 북한 매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성시백은 두 번째 방북했을 때 김일성이 감동할 만큼의 ‘사업’을 꾸려갔다. 김일성은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이 직접 차려온 술상 앞에서 밤을 지새우며 공로를 치하했다는구나.

1949년 대대를 이끌고 월북해 인민군 부사단장을 지낸 강태무.ⓒ조선중앙TV

북한 〈노동신문〉이 밝힌 성시백의 ‘혁혁한’ 공로는 다음과 같아. “그는 괴뢰 국방부부터 사령부, 헌병대, 육군 정보국에 이르기까지 조직선을 늘리고 적군 와해공작을 벌였다. 괴뢰 정부, 경찰, 정보, 남조선 미군부대와 장제스의 영사관까지 정보조직선을 그물처럼 펴놓았다.”

그는 남로당, 이른바 남조선노동당과는 궤를 달리하는 북조선노동당(북로당), 즉 북한 당국이 직파한 조직의 우두머리였어. “조선중앙일보, 우리신문 등 언론기관을 운영하고 금비라호라는 선박을 갖고 공작금을 조달(〈조선일보〉 1981년 4월15일)”했던 그는 한국 국내에 방대한 첩보원망을 조직했다.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 있던 그가 꼬리를 밟힌 데에는 “남로당 쪽에서 흘러나온 정보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성시백의 얼굴을 아는 남로당원이 자수를 해서 그의 정체를 확인해주었던 것(〈신동아〉 2010년 6월4일)”이지. 1948년 5월10일. 6·25 전쟁 한 달 전이었어.

‘반공 검사’로 유명한 오제도는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에는 자신의 좌익 수사를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 성시백 일당을 체포한 뒤 그 이전에 있었던 장제스와의 극비 회담 내용이 간첩들에게 누설됐다는 걸 보고하자 자신에 대한 냉대가 풀렸다고 회고했어. 이 사건에는 자그마치 해군 진해통제부 사령관도 연루돼 있었고, 장제스와 이승만 사이의 통역을 맡은 김우식까지 성시백의 프락치로 드러났지. 그를 통해 한국과 타이완, 한국과 미국 간 기밀사항이 고스란히 북한에 넘어갔단다.

남한 공안 당국에 남은 트라우마

저 악명 높은 국회 프락치 사건도 성시백과 맞닿아 있어. 1949년 5월20일 검찰은 남로당 지령을 받고 프락치 노릇을 한 국회의원 6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한다. 이후 13명으로까지 늘어난 이 ‘프락치’들은 기이하게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관계자이거나 반민특위를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들이었어. 수사도 부실하고 증거도 개운치 않아서 이승만 정권과 그에 결탁한 친일 경찰이 당시 진보적 국회의원들에게 프락치 혐의를 뒤집어씌웠다는 분석도 유력했지.

1948년 4월19일 38선을 넘은 김구 일행ⓒ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제공

그런데 정작 북한이 “그건 우리 영웅 성시백이 한 공작”이라고 실토(?)를 해버렸다. 그것도 〈노동신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못을 박아버렸지. “국회 안에서 민족적 감정과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들로 진지를 구축하고 국회 부의장과 수십 명의 국회의원을 포섭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외군 철퇴 요청과 평화통일안을 발표케 함으로써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들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넣었다(〈노동신문〉 1997년 5월26일).”

이 밖에 공산주의자를 극도로 혐오했던 김구를 설득해 38선을 넘어 평양을 방문하게 만든 것도, 1949년 2개 대대(대대장:강태무·표무원)를 월북시켜 한국군에 흑역사를 남긴 것도 성시백이었다고 해. 이승만 대통령과 직접 통하는 최고위층조차 성시백의 정체를 모른 채 그의 제안을 이승만에게 전달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위 〈조선일보〉) 성시백의 활동 범위는 넓었다.

전쟁이 터지고 경황없이 후퇴하는 와중에도 한국 정부는 이주하·김삼룡 등 남로당 거물과 더불어 성시백을 총살했다. 서울을 점령한 김일성은 성시백의 시신을 찾으라는 특명을 내렸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 남한 심장부 깊숙이 들어와 있던 북한 간첩 성시백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 아울러 한창 수사 중이던 성시백의 첩보망 역시 함께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는다. 이를테면 국회 프락치로 몰렸던 국회의원들은 한 명을 빼놓고는 전원 월북을 선택했어. 그것이 그들의 혐의를 입증하는 건 아니지만 진실은 영원히 알 수 없게 된 것이지.

성시백에 대한 트라우마는 남한 공안 당국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았다. “남로당 계열의 공산분자는 95%의 검거율을 보였으나 북로당 및 중공당 계열의 성시백 계열은 1차로 116명만을 검거했기에 검거율은 30%에 불과했으며 그 잔당들이 간첩의 핵심층을 이루고 암약 중(〈경향신문〉 1958년 11월12일)”이라는 보도는 그 공포의 잔상이었지.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라는 강박, “이웃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살펴보자”라는 집착은 그 결과라고 할 수 있었어. 북한을 빌미로 독재를 합리화한 역사와 더불어 북한의 끈질긴 대남 공작이 남한에 현실적인 위협이 됐던 역사 또한 부인할 수는 없단다. 그 와중에 빚어진 비극과 희생의 역사 또한 가볍지 않았다. 

김형민 (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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