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감독 "노동의 위계, 개인 탓만이 아니잖아요"

강애란 2021. 8. 14.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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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노동현장 조명.."비정규직·무인화 한 번쯤 생각해보길"

(서울=연합뉴스) 강애란 기자 = 한진중공업 노동 운동을 다큐멘터리로 다룬 김정근 감독이 전작 '버스를 타라'(2012), '그림자들의 섬'(2014)에 이어 다시 한번 우리 사회 노동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이번에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시민들의 발이 되어주는 교통수단, 지하철이다.

다큐멘터리 '언더그라운드' [시네마 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다큐 '언더그라운드'를 연출한 김정근 감독은 최근 화상 인터뷰에서 노동조합의 투쟁이나 노동자의 피해 호소가 아닌 노동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우리 사회의 노동 구조를 보여주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지하철이 운행되려면 기관사와 관제실 직원, 미화원, 터널 관리공, 철도 정비공 등 다양한 직군의 노동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영화는 초반에 이들의 모습을 말없이 보여주기만 한다. 어떤 일을 하는 건지 이들이 누구인지 이름, 나이 등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김 감독은 "지금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설명을 덧붙이고, 이름이 뭔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이런 정보를 주면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았다"며 "현장에서 일의 리듬이 느껴졌으면 했다. 어떤 강도로 일을 하고, 어떻게 휴식을 취하고, 밥을 먹는지 노동의 사이클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계를 닦고 조이고, 쓰레기를 줍고 분류하는 모습에서는 몸을 쓰는 노동이 주는 생기가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런 분위기는 현장에 견학 온 공업고등학교 취업특성화반 학생이 던지는 말 한마디에서 반전된다. "비정규직들은 일일이 발로 걷고, 손으로 툭툭 치는 거고. 정규직은 뭐 타고 가잖아요. 그런 거 보면 누가 비정규직이고 누가 정규직인지 다 티 나요."

김정근 감독 [시네마 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관객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는 김 감독은 "영화를 쭉 볼 때는 눈치채지 못하다가, 고등학생의 입을 통해 힘든 일은 비정규직이 한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불편해했으면 했다"고 말했다. 노동 현장 안에 깊숙이 배어있는 노동의 위계를 드러내고 싶었다는 것이다.

지하철 노동자들을 이야기하며 구의역 스크린도어 김군 사고나 부산지하철 기관사의 극단적인 자살 등 이슈화된 사건들을 끌어들이지 않고 노동 현장을 묵묵히 보여주는 데 집중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특정 사건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과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김 감독은 전했다.

"고되고, 더럽고, 힘든 일은 비정규직들이 해요. 청소노동자는 아예 정규직이 없고, 정비공의 경우도 관리·감독은 정규직이 하고 실제 장비를 들고 밤일은 비정규직이 하죠. 임금은 말할 것도 없고, 참 치사한 지점들에 차별이 있어요. 코로나 초기에는 마스크를 정규직만 줘서 문제가 되기도 했죠. 지하철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사회 노동 구조 곳곳에 이런 일들이 있어요."

다큐멘터리 '언더그라운드' [시네마 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김 감독은 질 낮은 노동 환경과 대우를 받는 비정규직 문제를 개인의 능력 탓으로 돌리는 최근 분위기에도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자신은 힘들게 일할 때 정규직은 웹툰을 보더라며 좀 더 열심히 해서 정규직이 돼야 했다는 젊은이의 한탄과 밤새 터널에서 일하고 나와 땀 범벅이 됐는데 씻을 곳이 없어 정규직이 쓰는 샤워 시설을 빌려 쓴다는 자조. 이는 과연 바늘구멍 같은 정규직의 관문을 뚫지 못한 개인만의 잘못일까.

인천공항 정규직 전환 찬반 논쟁을 비롯해 콜센터 노동자 직접고용을 반대하는 노조 등 최근 들어 빈번하게 불거지는 노노(勞勞)갈등은 2000년대 초반의 노동 운동과는 결이 다르다고 김 감독은 지적했다. 과거에는 노조가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더라도 비정규직의 정규화를 지지하고, 이들이 부당하게 해고되면 투쟁에 함께했지만, 이제는 연대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는 "IMF 이후 좋은 일자리의 공급은 적어졌는데, 수요가 높으니 빚어진 사태라고 본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성과주의가 만연화됐다"며 "정규직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트로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집안 환경이나 배경에는 관심이 없다. 트로피를 못 가진 이들은 박탈시키는 것이 정당하다는 참 무서운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 '언더그라운드' [시네마 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영화에 등장하는 부산공고 취업특성화반 학생들은 질 낮은 노동환경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미래를 보여준다. 이들은 전문 인력 양성이라는 목표로 3년간 기술을 배우지만, 사회생활은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시작한다. 김 감독은 이들이 사회 초년생으로 사회에 발을 내딛는 과정을 담은 '공고'(가제)를 차기작으로 준비 중이다.

정규직이라고 안정된 노동 환경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다. 영화에서는 무인 전철을 타고 퇴근하는 기관사의 모습이 씁쓸함을 남긴다. 기계가 노동자를 대체하는 무인화는 막을 수 없는 흐름이지만, 생각보다도 더 무자비하게 몰아친다고 기관사는 말한다. 고용의 효율성이나 무인화 등 변화의 흐름 속에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김 감독은 강조했다.

"사람들의 마음에 어느 순간부터 알게 모르게 계급이 생긴 것 같아요. 최소한 과연 이게 정당한지 의문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정규직, 무인화 등 우리가 처한 현재와 미래의 상황을 한 번쯤은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영화는 오는 19일 개봉.

다큐멘터리 '언더그라운드' [시네마 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ae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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