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 비판하던 페미니스트, 가부장이 되다
(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가부장제를 목소리 높여 비판했지만 '정상 가족'을 갈망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비혼주의자인 애인을 설득해 결혼한 뒤 가정의 주도권을 쥐게 되자 그렇게 비난했던 가부장의 모습을 답습하는 자신은 더욱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박강아름 감독이 이런 자신을 들여다보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자전 다큐멘터리다. 페미니즘과 비혼 인구가 확산하는 시대에 박 감독의 고민과 이야기는 그만의 개인사에 그치지 않는다.
'대체 결혼이 뭘까?', '나는 결혼을 왜 했을까?'라고 영화 속 아름이 자신에게 하는 질문은 결혼했건 안 했건, 앞으로 할 생각이 있건 없건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에게 더욱 깊숙이 가 닿을 만하다.
한껏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비장한 마음을 먹을 필요 없이,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공감을 나누기에 충분하다.
매사 열정적이고 마음을 먹으면 직진하고야 마는 박 감독과 매사 큰 욕망이 없지만 묵묵히 할 일을 하는 남편 성만 씨가 밀고 당기는 대화와 상황들은 유쾌한 웃음과 팽팽한 긴장을 오간다.
책을 들여다봐도 아기에 대한 이야기만 있을 뿐 임산부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미처 알지 못한 채 타지에서 홀로 임신과 출산을 겪은 박 감독은 체중을 15㎏이나 줄어들게 한 극심한 입덧과 잘못된 수유, 변비와 요실금에 따른 끔찍한 고통을 다소 적나라한 내레이션과 직접 그린 간결한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애초 이번 영화의 기획은 아름의 프랑스 유학에 따라나선 성만이 주인공인 '외길식당'으로 출발했다.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는 성만이 가사와 육아를 도맡으며 우울증을 겪게 되자 아름은 성만에게 요리사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집 거실에 식당을 차리고 유학생 등 한국인들에게 한국 음식을 차려주고 이야기를 나누는 걸 제안했고, 그걸 카메라에 담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전작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에 이어 다시 박강아름의 이름을 내건 '박강아름 결혼하다'가 됐다.
결혼 전 한국에서 두 사람은 각자 경제력을 가진 동등한 관계였지만, 프랑스에서는 현지어를 할 줄 아는 아름이 경제와 행정을 맡게 되면서 전복된 성 역할과 그 구조가 드러나는 두 사람의 대화가 매우 흥미롭다는 김문경 프로듀서의 피드백 때문이었다.
한 사람이 일방적인 권력을 쥐는 가부장제는 환경이 달라지고 성 역할이 바뀐다고 해서 통쾌함을 안겨주지는 않음을, 관계의 일방통행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불행임을 다큐는 웃기고 슬프게 증명한다.
영화 개봉에 맞춰 한국을 찾은 박 감독을 최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엄청나지만 솔직하고 건강한 자기애'를 칭송하자 그는 깔깔 웃으며 "안다"고 인정했다.
10대 때부터 혼자 영화를 만들어 온 박 감독은 대학 학부와 석사를 영화과에서 공부했다. 대학원에서 에세이 필름이나 자전 다큐 등에 대한 '주관적 영상'을 접한 이후 꾸준히 자전 다큐 작업을 해 오고 있다.
수업을 들으며 단편 '내 머리는 곱슬머리'(2007)를 만들었고, 석사 논문을 쓰면서 첫 장편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2016)를 찍었다.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와 자신감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담은 셀프 카메라(내 머리는 곱슬머리)에서 시작한 여정은 외모지상주의와 관습화된 여성 이미지를 비판하는 데(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로 나아간다.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는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받고 여성영화저널리스트협회가 수여하는 다큐멘터리상 후보에 오르며 주목받았다.
"평소에도 수다스러워서 친구들을 만나도 내 얘기를 많이 하는데, 그렇게 많이 얘기하고 집에 돌아와도 해소가 안 돼서 또 얘기가 하고 싶은 거예요. 빈 시간을 혼자 견디는 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그게 외로움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누구나 살면서 그 정도의 외로움은 느끼니까요. 어쨌든 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 카메라를 들었고 그게 위안이 됐어요. 저를 찍는 게 재밌었고, 그걸 또 작업으로 연결하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박 감독은 현재 프랑스에서 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한 현대 미술을 공부하고 있다. 그의 퍼포먼스는 이번 영화에도 삽입돼 잠시 엿볼 수 있다.
그는 "현대미술이 (현재의 작업에) 어느 정도 자양분이 됐다"고 했다.
"중학교 시절 만든 실험 영화가 당시 광주비엔날레에서 시민 프로젝트 중 하나로 선정돼 미술관에서 상영했던 적이 있어요. 치과에 갔다가 학교로 돌아가야 했지만 제 작품이 상영되는 걸 보고 싶어서 미술관으로 갔죠. 간 김에 다른 작품들도 둘러봤는데 어린 마음에 그때 경험이 인상적으로 남은 것 같아요."
박 감독은 내년 초 프랑스로 돌아가 학업과 작업을 함께 이어갈 예정이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화가 나혜석 다큐를 위한 자료 조사 작업을 하고, 다섯 살 난 딸 보리와 8살인 반려견 슈슈를 차기작 주인공으로 삼아 3∼4개월 전부터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했다.
점점 성장해가는 보리와 점점 늙어가는 슈슈의 우정과 사랑,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슈슈의 마지막 날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19일 개봉. 전체관람가.
mih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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