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광복군 유물 등 항일독립유산, 보물·문화재 된다
한국광복군 훈련교재 등 4건 문화재 등록예고
[서울=뉴시스] 이현주 기자 = 문화재청은 광복절을 앞두고 태극기와 광복군 유물 등 항일독립유산들을 대거 보물과 문화재로 지정·등록 예고했다.
12일 열린 제4차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의 심의에 따라 '데니 태극기'와 '김구 서명문 태극기', '서울 진관사 태극기' 등 태극기 유물 3건은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이와 별도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서명문 및 축하문',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光復)', '한국광복군 훈련교재 정훈대강', '김좌진 장군 사회장 약력서' 4건은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이번에 지정 예고한 태극기 3건은 19~20세기 초 제작된 것들로, 일제강점기 혹독한 시련 속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간절한 염원을 담은 문화재다.
우리 역사 최초로 국기(國旗) 제작이 시도되고 변천되는 과정과 독립에 대한 열망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간절한 염원을 담은 대한민국 역사의 대표이자 우리 민족의 상징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았다.
'데니 태극기(데니 太極旗)'는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미국인 오웬 니커슨 데니(Owen Nickerson Denny, 1838~1900)가 소장했던 것이다. 1891년 1월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가지고 간 것을 1981년 그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기증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학계에서는 이 태극기가 데니의 유품 중에서 발견됐기 때문에 그가 조선에 마지막으로 머문 해인 1890년을 제작의 하한연대로 보고 있다.
세로 182.5㎝, 가로 262㎝로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옛 태극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클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기 제정의 초창기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라는 점에서 뜻깊은 사료다.
우리나라에서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시기는 1882년 9월이었고 1883년 3월6일 고종은 전국에 사용토록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19세기 말 한국의 국기가 반포된 이래 그 모습을 그리거나 기록한 자료들은 일부 남아 있지만 실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데니 태극기'는 우리나라 국기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金九 署名文 太極旗)'는 1941년 3월1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김구(1876~1949) 주석이 독립의지를 담은 글귀를 적어 친분이 있던 벨기에 신부 매우사(梅雨絲, 본명 샤를 메우스 Charles Meeus)에게 준 것이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매우사 신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이 태극기를 전했고, 후손들이 보관하다가 '안창호 유품' 중 하나로 1985년 3월11일 독립기념관에 기증됐다.
세로 44.3㎝, 가로 62㎝ 크기의 비단 천에 청색과 홍색의 천으로 태극을 만들어 붙이고, 흑색 천으로 4괘를 덧대어 제작한 소형 태극기다.
이 태극기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김구와 안창호로 대표되는 일제강점기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한국인들의 광복에 대한 염원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서명문에서 김구는 망국의 설움을 면하고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광복군을 도와줄 것을 강하게 호소했다.
'서울 진관사 태극기(서울 津寬寺 太極旗)'는 2009년 5월26일 서울 은평구 진관사의 부속건물인 칠성각(七星閣)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내부 불단(佛壇) 안쪽 벽체에서 발견된 것으로, 태극기에 보자기처럼 싸인 독립신문류 19점이 함께 발견됐다.
신문류는 '경고문',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 '신대한', '독립신문' 등 5종으로 1919년 6월6일부터 12월25일까지 발행된 사실로 미루어 진관사 소장 태극기 역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관사 태극기의 가장 큰 특징은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해 항일(抗日) 의지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특히 왼쪽 윗부분 끝자락이 불에 타 손상됐고 여러 곳에 구멍이 뚫린 흔적이 있어 만세운동 당시 혹은 그 이후 현장에서 사용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현재 1919년에 제작된 태극기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 태극기는 1919년에 제작된 실물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 우리나라 사찰에서 최초로 발견된 일제강점기의 태극기로 불교 사찰이 독립운동의 배후 근거지나 거점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울러 문화재로 등록 예고되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서명문 및 축하문'은 1940년 9월17일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임시정부 주석이자 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인 김구의 주관 아래 거행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관련 유물이다.
서명문은 전례식에 참석한 중국 측 인사와 서방 외교사절, 신문사 대표들이 서명한 유일의 원본 방명록으로, 충칭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독립운동, 외교 활동, 언론 창구를 확인할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光復)'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국광복군의 대일항전을 선전해 항일 독립사상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1941년부터 1942년까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에서 발행한 기관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독립운동 취지와 활동 상황을 군사, 외교, 국제정치, 경제 등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어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한국광복군 훈련교재 정훈대강'은 1945년 5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에서 발행한 소책자 형태의 훈련교재로, 조국 광복의 최선봉을 담당할 한국광복군의 '강철 같은 정신 무장'을 강조하고 있다.
교재는 한국광복군이 이전까지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돼 있다가 중국과 끊임없는 교섭을 거쳐 마침내 1945년 5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속으로 변경돼 그 통할을 받음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고 있어 역사·사료적 가치가 높다.
'김좌진 장군 사회장 약력서'는 1930년 1월 만주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사회장(1930년 3월)에서 낭독된 약력서다.
김좌진 장군은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에서 무장독립군을 이끌며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한국독립운동사의 무장투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본 약력서는 그의 출생과 성장, 사망, 주요 활동과 사상, 가족관계 등을 연도별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김좌진 장군의 전 생애를 순차적으로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다.
한편 지난 6월 등록 예고된 바 있는 '서윤복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메달'과 '공군사관학교 제1기 졸업생 첫 출격 서명문 태극기'는 문화재로 등록됐다.
☞공감언론 뉴시스 lovelypsyche@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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