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전투 이끈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100년만에 고국으로

유현민 2021. 8. 1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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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 승리의 주역..해방 후 남북한 모두에 소외되기도
광복절에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

(서울=연합뉴스) 유현민 기자 = 100년 만에 고국 땅을 밟게 된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 장군 앞에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다.

백두산과 만주 벌판을 누비며 일본군을 토벌해 '독립전쟁의 전설'로 통하는 그는 일본군에게는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두려움의 존재였고, 한국 민중에게는 '백두산 호랑이' '축지법을 구사하는 장군'으로 불릴 만큼 추앙받았다.

부하들은 함께 노동하고 고난을 나누며 투쟁했던 그를 존경과 사랑을 담아 '홍 대장'으로 부르기도 했다.

1868년 8월 27일(음력)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발군의 사격 실력을 바탕으로 구한말 의병투쟁에 몸을 던졌다.

1907년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포수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에 타격을 줬다.

필사본만 전하는 '홍범도 일지'에 따르면 일제는 당시 홍 장군을 체포하려고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삼았다가 그가 의연한 태도를 보이자 가족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전후 국경을 넘어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간도에서 대한독립군을 창설해 함경도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다. 3·1운동 후 만주와 연해주에서 편성된 독립군 부대가 벌인 최초의 전투였다.

이듬해에는 독립운동사의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인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20년 6월 일본군 19사단의 추격대대를 궤멸시킨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57명, 부상자도 200여 명에 달하지만, 독립군 전사자는 4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로 만주 지역 독립군의 항일독립의지가 크게 고무됐고, 무장투쟁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계기가 됐다는 게 국가보훈처의 평가다.

같은 해 10월 보복전에 나선 일본군 대부대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합세해 무찌른 것이 청산리 전투다. 홍 장군은 일제강점기 최대 대첩으로 꼽히는 이 전투에서도 큰 몫을 담당했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을 피해 1921년 1월 만주에서 다시 연해주로 옮겨간 그는 같은 해 6월 '자유시 참변' 때 이르쿠츠크파 편에 섰다가 소련군의 일원이 됐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김규식·여운형·조봉암 등 50여 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레닌을 접견하고 레닌 이름이 새겨진 권총 한 자루, 금화 100루블, '조선군 대장'이라고 쓴 레닌 친필 증명서 등을 받기도 했다.

이는 해방 후 반공을 국시로 한 남쪽에서 그가 한동안 철저하게 배척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됐다.

1923년 군복을 벗은 뒤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일하던 그는 1937년 11월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밀려났다.

이듬해 4월 크즐오르다로 이주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함께 이곳으로 옮겨온 고려극장의 수위 등으로 일하며 말년을 보냈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까지 올라 한때 두만강 일대를 호령하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그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된다 (서울=연합뉴스)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광복절인 15일 저녁 한국으로 돌아온다. 사진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공원의 홍범도 장군 흉상. 이 공원에는 독립운동가 계봉우 선생과 부인, 그리고 홍범도 장군이 모셔져 있었다. 그러다 지난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방문 당시 계봉우 선생과 부인의 유해는 함께 모셔왔고 홍범도 장군은 오랜 협상과 노력 끝에 이번에 모셔오게 됐다. 2021.8.12 [김진석 작가 사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scoop@yna.co.kr

항일 무장투쟁에서 첫손에 꼽히던 그였지만, 해방 후 홍범도 장군은 남북한 모두에서 소외됐다.

정부는 1962년에 와서야 홍범도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그 뒤로도 한동안 외면했다.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소련군의 일원으로 싸우고 레닌의 선물까지 받은 인물이 높이 평가될 수는 없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과 비교될 수 있다는 이유로, 중국이나 옛 소련에서는 그가 공산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독립을 위해 항일운동을 했다는 논리에 밀려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다가 1993∼1994년 북측이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 문제를 제기하며 다시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남측도 카자흐스탄 정부 측과 유해 봉환과 관련한 논의를 시작했다.

이후 보훈처는 1996년부터 2017년까지 5차례에 걸쳐 크즐오르다의 홍범도 장군 묘역 정비사업을 지원했지만 유해 봉환 사업은 지지부진했다.

다시 탄력을 받은 것은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순방 계획을 보고받으며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추진하라고 지시하면서부터다.

이후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카자흐스탄 측에 홍 장군의 유해 봉환을 위한 협조를 요청했고, 같은 해 12월 카자흐스탄 측에서 2020년 예정됐던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유해 봉환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처음으로 표명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지난해 3·1절 기념사에서 홍 장군의 유해 봉환 계획을 처음 공표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으로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이 연기되면서 미뤄졌다.

그리고 이번에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국빈 방한이 성사되면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고서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을 피해 1921년 연해주로 이주한 이후 정확히 100년 만이다.

[그래픽] 홍범도 장군 유해, 국내 봉환 (서울=연합뉴스) 이재윤 기자 = 백두산과 만주 벌판을 누비며 일본군을 토벌해 '독립전쟁의 전설'로 통하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이 올해 광복절에 이뤄진다고 12일 청와대가 밝혔다. yoon2@yna.co.kr 트위터 @yonhap_graphics 페이스북 tuney.kr/LeYN1

hyunmin62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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