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뉴욕서 이런 일이.. 목숨 걸고 탈출한 19세 소녀 이야기 [왓칭]
"여성은 출산만 하라"는 공동체
실화 담은 책 '언오소독스' 원작
미니시리즈 '그리고 베를린에서'
2009년 미국 뉴욕 초정통파 하시딕 유대인 공동체 ‘사트마’에서 한 여성이 탈출했다. 당시 22세, 데버라 펠드먼이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채 17세에 중매 결혼해 19살에 아이까지 낳았다. 그가 공동체에서 벗어난 과정 하나하나가 기적에 가까웠다.
그 경험을 담은 책 ‘언오소독스(Unorthodox)’는 2012년 출간 직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여성의 교육 기회를 박탈하고 오로지 ‘출산’이란 공통의 목표를 위해 살아가도록 하는 하시디즘 공동체의 민낯이 세상에 드러났다. 책은 최근 한국에도 번역됐다.
책만큼이나 이 책을 원작으로 한 TV 미니시리즈도 인상깊다. 미국·독일 합작 드라마로 지난해 넷플릭스에 공개된 ‘그리고 베를린에서’다. 뉴욕 사트마 공동체에서 열일곱에 결혼한 주인공 에스티가 베를린으로 떠나 자아를 찾는 과정을 담았다. 뉴욕 이야기는 실제 데버라 펠드먼의 삶을 바탕으로 했고, 베를린에서의 이야기는 각색한 것이다.
◇가장 자유로운 도시 뉴욕, 그 가운데 ‘사트마’
드라마의 무대는 데버라 펠드만이 나고 자란 뉴욕 브루클린이다.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인 뉴욕, 그중에서도 브루클린, 예술가와 ‘힙스터’의 성지라는 윌리엄스버그. 놀랍게도 이곳에 뉴욕에서 가장 큰 초정통파 하시딕 유대인 공동체 ‘사트마’가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이곳에만 약 7만 2000명의 유대인이 모여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드라마는 엄격한 고증을 통해 폐쇄적인 공동체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자손인 이들은 뉴욕 한복판에 살면서도 영어 대신 선조의 언어인 이디시어를 쓰고, 정규교육 대신 유대교 경전과 탈무드만 공부한다. 선조들의 의복과 전통을 고집하며 남성들은 한여름에도 검은 코트와 모피 모자를 쓰고, 수염과 귀밑머리를 길게 기른다. 여자들은 머리를 밀고 가발을 쓴다.
이들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2차 세계대전 때 홀로코스트로 숨진 유대인의 인구수 600만명을 복원하는 것이다. 여성의 역할은 철저히 가정을 돌보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데 국한된다. 한 가정당 아이를 5~6명, 많게는 10명 넘게 낳는다. 이들은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쓰지 않고 바깥 문명과 완벽히 격리된 채 탈무드 속 유대인처럼 산다.
◇신이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셔서…
드라마 주인공 에스티는 어려서부터 이런 전통에 의문을 가졌다. 여자는 소리 내 노래할 수 없고, 책을 읽어선 안 되고, 10대 때 한 두 번 본 남성과 정략결혼을 하고, 남편은 왕처럼 대접받아야 하는. 공동체에선 당연한 규칙이지만 에스티는 늘 “왜?”라고 되묻는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에스티는 괴짜에 골칫거리다.
그런 그가 베를린에서 인터넷을 처음 접하고 가장 먼저 검색한 문장이 “신은 존재하는가”였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인터넷엔 수백 가지 답이 나왔다. 친구가 말한다. “질문은 할 수 있지만, 올바른 답은 네가 직접 골라야 해”. 평생 선택할 권리를 박탈당했던 에스티가 너무 많은 선택지를 가진 보통 인간의 삶으로 편입되는 순간이었다. 왜 공동체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냐는 친구들 질문에 에스티는 이렇게 답한다. “신께서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셨어”.
신이 기대하셨던 많은 것 중 에스티에게 가장 어려웠던 건 출산이었다. 유대교 경전 토라의 첫 번째 계명이 ‘출산’인데, 심리적으로 억압된 에스티에겐 부부관계 자체가 고통이었다. 첫날밤에 실패하자 남편은 본인의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때부터 모든 가족이 둘의 부부관계에 관여한다. 우리나라에선 막장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출산과 양육이 지상과제인 공동체에서 여성들이 겪어야 하는 일이다.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왕을 모시듯이 하라”고 한다. 그는 반문한다. “그럼 전 왕비가 되나요?”.
◇음악은 음악일 뿐, 호수는 호수일 뿐
초정통파 유대인 공동체에서 여자는 공개적으로 노래할 수도, 악기를 연주할 수도 없다. 뉴욕에서 에스티는 할머니와 몰래 음악을 듣고 몰래 피아노를 배우는 걸로 마음을 달래야 했다. 베를린에 도착한 그는 우연히 들어간 캠퍼스에서 드보르작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2악장을 듣고 음악의 세계에 다시 흠뻑 빠져든다.
이 곡은 1875년 당시 서른넷이던 드보르작이 재능있지만 가난한 예술가를 지원하는 장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하고서 쓴 곡이다. 생애 처음으로 가난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다. 첫 아들을 얻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하던 시절이기도 하다. 베를린 정착을 위해 음악대학 장학생 선발이 절실한 에스티, 자유와 행복을 향해 첫발을 내디딘 그의 상황과 겹친다.
에스티는 자신을 옥죄는 공동체에서 탈피하기 위해 공동체가 가진 트라우마의 근원으로 향한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 100만명을 학살한 베를린이란 도시에서 음악대학 학생들은 유대인, 폴란드인, 나이지리아인, 독일인이 하나의 오케스트라로 모여 함께 연주한다. 음악이 이 의외의 세계들을 하나로 모은다. “조부모님이 수용소에서 돌아가셨다”는 에스티에게 이스라엘인 친구는 “우리나라에선 절반이 그래”라며 무심하게 받아친다.
주인공이 베를린에 도착해 처음으로 찾은 외곽의 ‘반제(Wannsee) 호수’에선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하기로 결정한 저택이 바로 보인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을 때 자유를 찾아 헤엄쳐오던 사람들을 총 쏘아 죽인 곳이기도 하다. 선뜻 호수에 몸을 담그지 못하던 에스티는 홀린 듯 가발을 벗어 던지고 비로소 물에 몸을 맡긴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순간이다.
◇주인공의 ‘처음’에 함께 위로받다
에스티가 자신을 감싸던 단단한 알을 하나하나 깨고 나갈 때마다 내 주위를 둘러싼 벽을 떠올린다. 견고해서 절대 깨지거나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높은 벽.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워진 벽들은 우리를 지탱하기도, 옥죄기도 한다. 안온한 생활을 박차고 자아를 찾아나선 에스티는 탈무드의 한 구절을 되뇐다. “내가 아니라면 누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가 맞닥뜨리고 깨부수는 수많은 ‘처음’이 보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무거운 가발을 벗어 던진 순간, 편안한 옷을 입고 잠들던 순간, 친구들과 함께 자유롭게 즐긴 저녁 파티, 모두가 솔직했던 베를린의 클럽… 용기 있게 허물을 벗어나가는 에스티의 모든 여정에 응원을 보낸다.
개요 드라마(미니시리즈) l 미국 l 2020 l 시즌 1 l 4회·회당 52~55분
등급 15세 관람가
특징 실화 바탕, 높은 울타리를 넘어 내디딘 눈부신 여정
평점 로튼토마토🍅96% IMDb⭐8.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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