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훈련도 적과 타협.. 北만 쳐다본 당정청
한미 연합훈련 이틀째인 11일 군 내부에선 “이렇게 부실한 훈련으론 유사시 대처가 어렵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합참에 파견된 증원 병력이 필수 인력의 12분의 1(30여 명) 수준이고, 한미연합사의 지시를 받아 병력을 운용하는 사단급 이하 부대의 훈련 참가도 최소화된 탓이다. 훈련을 중단하라는 북한의 내정 간섭을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사실상 묵인하는 가운데 정부·여당이 앞다퉈 훈련 연기 여론을 조성하고, 군조차 ‘안보’보다 ‘정치’ 논리에 휘둘린 결과라는 지적이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주권국이 자국 방어 훈련을 적(敵)과 타협할 수 있다는 발상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라고 했다. 여권과 정부는 희망적 사고에 기대 무리한 요구를 원칙 없이 수용하다 북한이 본색을 드러내자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지난달 27일 남북 통신선 복원에 합의했을 때 정부가 북한의 저의를 면밀히 따졌어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이 강력 반발할 게 명백한 한미연합훈련을 목전에 두고 대남 유화책을 쓴 의도를 간과했다는 것이다. 당시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사이 친서가 오간 사실을 공개하며 “평화의 출발점”이라고 홍보했다. 여당은 “가뭄 깊은 대지에 소나기처럼 시원한 소식” “한반도 관계에 청신호가 켜졌다”고 했다.
하지만 김여정 부부장은 닷새 뒤 담화에서 ‘통신선 복원 의미를 확대 해석하지 말라’며 찬물을 끼얹었다. 이어 “군사연습은 북남 관계의 앞길을 흐리게 하는 재미없는 전주곡”이라며 훈련 중단을 본격 압박했다.
정부·여당은 자중지란에 빠졌다. 훈련 연기론과 연기 신중론이 맞섰다. 이런 가운데 박지원 국정원장이 정보위 소집을 자청해 훈련 연기 필요성을 강조했고, 범여권 의원 74명은 이에 동조하는 연판장을 돌렸다. 결국 군 당국이 훈련 참가 요원을 대폭 줄이며 ‘유명무실 훈련’을 예고했는데도 김여정은 연합훈련이 시작된 날 “연습 규모가 어떠하든 침략”이라며 주한미군 철수까지 거론했다. 그리고 예정된 수순처럼 통신선을 다시 끊었다. 보름여 만에 급반전된 상황에 대해 청와대는 “예단하지 않겠다”며 사실상 침묵했고, 민주당은 11일 북의 강경 담화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지도부 회의에서) 관련 논의는 없었다”고 했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통신선 복원과 한미 훈련 반발, 통신선 재단절로 이어지는 북한의 움직임은 사전에 설계됐을 것”이라며 “북은 남남(南南) 갈등 유발, 한미 동맹 훼손, 후속 도발 명분 축적 등 원하는 과실은 모두 따갔다”고 했다. 고위 탈북자 A씨는 “대화에 급급해할수록 북한은 한국을 얕잡아 보고 맘대로 흔들려 한다”며 “당장 얼굴을 붉히더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북도 한국을 존중한다”고 했다.
북한의 이번 행보는 작년 6월 대북 전단을 트집 잡아 3주 동안 파상적인 대남 공세를 퍼부었던 상황을 연상시킨다. 당시 북은 우리 정부가 전단 금지법 제정 의사를 밝히고 전단을 살포한 탈북 단체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는데도 대남 비난 담화를 쏟아내며 통신선 단절,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등을 강행했다. 안보 부서 관계자는 “북한이 작심하고 대남 공세를 퍼붓는 것은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차원”이라며 “작년 6월엔 경제난과 주민들의 사상 이완에 대처해야 했고 지금은 군부의 불만과 사기 저하가 심각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북한 등 외부 세력 반발에 안보 주권(主權)을 포기한 사례는 이번 훈련 축소가 처음이 아니다. 경북 성주 사드 기지는 2017년 배치 이후 장병 막사 등 생활 필수 시설 공사가 4년간 이뤄지지 않았다. 사드 배치에 반발했던 중국을 의식해 방치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졌다. 지난 3월 방한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이 “동맹으로서 용납 못 할 일”이라고 강력 항의하자 비로소 공사가 재개됐다. 2018년엔 9·19 남북군사합의에 따라 접경 지역 훈련이 중단되자 주한미군이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작년 에이브럼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은 “최근 폐쇄된 훈련장 때문에 준비 태세가 지장을 받고 있다”며 “한미 합동 실사격 훈련을 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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